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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유다서(51)

8.2. … 육체를 더럽히며, ...  육체를 더럽힙니다(defile the flesh[KJV], pollute their own bodies[NIV]). 앞에서 보았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관계를 맺어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며 섬기고 절하면서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이단들의 뉴스를 들으면 가끔 그런 뉴스까지 들립니다. 연약한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 말입니다.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가장 약한 자들 중의 하나인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말입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쥐꼬리만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도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갑질한다고 하죠. 약자들을 그냥 두어도 모자랄 판에 갑질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앞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지만, 최소한 이 구절에 의하면, 음행(sexual immorality), 우상 숭배(idolatry), 간음(adultery), 탐색(male prostitution), 남색(homesexual offend), 도적(thievery), 탐욕(greed), 술취함(drunkenness), 모욕(slander), 속여 빼앗음(사기, swindle) 등은 사악한 것들(불의, wickedness)입니다. 모두 육체를 더럽히는 데 앞장서는 것들입니다. 이런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이러한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위에서 빌 마이어스(Bill Byers)의 &

유다서(50)

B. 유다 시대의 거짓 선생들에 대한 묘사(8-16) 1. 비방하는 말(8-10)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유 8) 8.1. 우리 가운데 몰래 끼어든 자들이, 유다가 말한 똑같은 바로 그 방법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들입니까? 믿지 않는 것(유 5),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것(유 6), 그리고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는 것(유 7)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꿈을 꾸며 그런 일들을 저지릅니다. 아시다시피 꿈(dream)은 잠을 자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일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Jacob's dream of a ladder of angels, c. 1690, by Michael Willmann 라이프성경사전에 의하면 꿈은 어떤 바람(wish)이나 소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인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계시의 한 방법이었습니다(창 20:3; 28:12; 37:5-11; 40:5; 단 2:4; 마 1:20). 즉, 제한된 지혜와 감각을 지닌 인간들에게 초월하신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뜻을 전하시려고 사용하신 초자연적인 역사 가운데 하나로서 일종의 이상(異像, vision)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로는 야곱(창 28:12), 요셉(창 37:5-10), 솔로몬(왕상 3:3-15), 다니엘(단 7장),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마 1:20-21), 동방박사들들(마 2:12), 고넬료(행 10:3-6), 베드로(행 10:10-16), 바울(행 16:9; 23:11; 27:23-24)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의 꿈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말고(렘 23:25-32), 허탄한(거짓된) 꿈을 꾸지 말라고 경고합니다(슥 10:2). 꿈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하거나 이미 입학해서

유다서(49)

7.3.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이야기가 또 옆길로 갔습니다. 유다서 7절로 돌아갑니다. 영원한 불(eternal fire)의 형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벧후 2:6-11)  불의 형벌을 받아 잿더미가 되었습니다(창 19:24-28).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 3:12)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Hell (on the right) is portrayed in this 16th-century Hieronymus Bosch painting.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 (계

유다서(48)

7.2. 나의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나의 생각이 너무 심하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물론 바울의 뒷꿈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의 고백을 저도 감히 해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6-24) 사도 바울의 탄식을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엄청난 선포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7:25-8:2)  나는 언제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7장의 탄식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7장 2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도 바울은 7장의 탄식(적절한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습니다)에서 한참 머물렀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사도 바울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나왔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합니

유다서(47)

3. 소돔과 고모라(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 7)  The Destruction of Sodom and Gomorrah, John Martin, 1852 7.1.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창 19). 그 이웃 도시들이란 아드마(Admah)와 스보임(Zeboyim)을 가리킵니다(신 29:23).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의 멸망의 원인은 남색, 동성애, 음란 등입니다. 사해(the Dead Sea)의 남서쪽에 있던 이 도시들의 멸망은 아브라함(Abraham)과 롯(Lot) 당시에 하나님의 심판의 실례(illustration)로써 성경에서 20번 이상 사용됩니다. 대홍수 심판 후 450년 만에 이 도시들이 멸망했으므로, 노아(Noah)의 아들 중의 하나인 셈(Shem)이 여전히 살아있었을 때입니다(창 11:10-11). 이 사건은 노아가 죽은 후 100년만에 일어난 일이므로(창 9:28), 사람들은 노아가 전파했지만 그들이 거부한 의(righteousness)와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 알았을 겁니다. 이 도시들의 죄들은 표면으로 나타난 죄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무리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절한 까닭이라. (신 29:25-26) 그렇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터인데,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섬기고 절한 까닭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알지도 못한 신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신들을 따라가서 섬기고 절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나타나는 행동이 음란이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는

유다서(46)

Hans Memling’s Last Judgment, 1467-1471, National Museum, Gdańsk 6.4.2. 심판의 장면을 한 번 읽어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슥 3:1-5) 이 장면은 대제사장 여호수아(Joshua the high priest)를 재판의 상대로 봅니다. 여호수아는 스룹바벨(Zerubbabel)과 함께 귀환했습니다(스 3:2; 5:2; 학 1:1). 여호와의 천사(the angel of the Lord)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사탄에 의해 고소당합니다. 사탄은 법정에서 고발하는 자리인 오른쪽에 서 있습니다(시 109:6). 사탄은 “대적(adversary)”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 악의적인 대적은 이스라엘의 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 여호와 앞에 서 있습니다. 재판(심판)의 상황이 심각합니다. 만약 여호수아의 혐의가 벗겨지면 이스라엘은 용납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거절당하면 이스라엘은 거부됩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책망하십니다(슥 3:2; 유 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불에서 꺼낸 그

유다서(45)

6.4.1. 큰 날의 심판(the judgment of the great day).   이것은 모든 귀신과 사탄이 “불못(lake of fire)”에 영원히 가두어지는 마지막 심판을 일컫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계 20:10)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 20:15) Stefan Lochner, Last Judgment, c. 1435. Wallraf-Richartz Museum, Cologne 여기서 역시 라이프성경사전을 참고하여 심판에 대해 알아봅니다. 심판(審判, judgment)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선악간에 판단을 내리는 일(히 9:27)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징벌과 관련된 재난 혹은 만물의 심판자로서 하나님의 선고 등에 대해 언급됩니다(잠 19:29; 전 12:14; 미 7:9; 마 5:21; 살후 1:5). 이미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대홍수(창 6-8장)나 이집트에 내려진 10가지 재앙들(출 6-12장)을 통해 심판의 전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여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계속해서 회개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범죄와 심판, 회개와 구원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상을 숭배하며 택한 백성을 압제하는 이방 나라들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 아래 놓였습니다(사 34:5; 렘 48:21). 심판의 원인에 대해 성경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롬 3:23)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롬 3:19-20).

유다서(44)

6.4.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즉 그 말씀을 거역한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4)  또 다른 견해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 사탄(Satan)과 사악한 천사들의 타락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7-9)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밝혀야 할 내용이고, 저는 솔직히 어떤 경위인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또 그 사탄과 졸개들은 이 땅에서 활개치고 돌아다닌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의 딸들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샀든, 하늘의 전쟁에서 천사 미가엘과의 싸움에서 져서 땅으로 내쫓겼든 간에, 그들은 온 천하를 두루 다니며(욥 1:7) 하나님의 백성을 꾀고 있습니다. 자기의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처소를 떠난 이들의 결말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반역한 천사들을 심판하십니다. 

유다서(43)

6.3. 그러니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모양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3-17)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믿음과 들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1) 이사야의 이 질문 앞의 52장 13절부터 53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부터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더러 하나님의 침묵이 있었던 경우도 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이든 또는 듣기 거북한 말씀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결정적으로 2,000여 년 전에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요 1:14). 그리고 그 말씀은 이 땅에서 30여 년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의 사도와 교부와 제자들을 통해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을 통해 듣습니다. 그 말씀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욥(Job)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Job by Léon Bonnat (1880)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

유다서(42)

6.2.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천사라도 자기의 본분을 떠나 엉뚱한 일을 하면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집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1-3)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을 천사들로 이해했는데, 이들이 사람의 딸들, 즉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는 것까지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재미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예배당에 조각상이나 그림이 걸려있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가톨릭 교회와는 사뭇 다르지요. 그래서인지 교회음악이 음악의 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성경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은 “들어라.”였습니다. 하와가 뱀의 꾐에 빠진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The Fall of Man by Peter Paul Rubens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6)  하와는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그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유다서(41)

2. 타락한 천사(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 (유 6) 6.1.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  ‘적재 적소(the right man in the right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교회의 여러 표어 중 ‘정한 장소, 정한 시간’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에는 몰랐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와 피치못할 사정으로 시간과 자리를 지키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소천하신 저의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장사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항상 정한 시간에 가게 문을 여셨습니다. 성경의 여러 본문 중에 에스더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에 2:21-23)  Esther talking to Mordecai 저는 에스더서를 특별히 좋아힙니다. 주인공은 에스더(Esther)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조연인 모르드개(Mordecai)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겉으로 드러난 주인공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이지만,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공이겠지요. 에스더서는 온통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작동하는 책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모르드개가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지기라는 권위를 부여받은 지위(position of authority)에 없었더라면, 왕의 내시 빅단(Bigthana)과 데레스(Teresh)가 계

유다서(40)

5.7.6. 예수님의 반응을 보실까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눅 17:17-18)  분명히 예수님은 열 명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열 명 모두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전 인구의 90 퍼센트가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너무 무리한 해석인가요? 아니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 90 퍼센트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최소한 저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 이런 일 저런 일 등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중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의 비율로 감사를 표할까요? 물론 계량적으로 수치를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이 나병환자의 예에서처럼 10 퍼센트만이라도 하나님을 칭찬하면 될텐데 말입니다. 그 10 퍼센트가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처럼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느 정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전 인구의 10 퍼센트만이 감사를 표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나병환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나머지 나병환자들이 이방인, 즉 사마리아인이었는지 유대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유대인이었지 싶습니다. 그러니 “이 이방인 외에는…”이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비록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고 둘러서 가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은혜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결정적인 선언

유다서(39)

5.7.5. 이 나병환자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손가락질 당하던, 한 마디로 아웃사이더였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감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는 않았던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말하는 ‘믿는 이’라는 신분이 감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야. 난 거듭난 사람이라고. 난 저기 저 사람들과는 달라. 난 천국에 갈 사람이야.”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은 정작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나의 감사의 마음이 무뎌진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부어주신 은혜와 사랑이 엄청난데, 나는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그만큼 내가 아둔하고 어리석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정작 감사를 표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나 사역 중에 사마리아인을 비롯해 이방인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벌레 취급당하던 사회의 약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시험시간에 맞추어 그 학교의 시험장소로 갔습니다. 저는 약 2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에 어떤 중년의 여자분이 오셨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분은 신학생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다른 학과생들이 치루는 영어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이 문이 열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왜 문을 일찍 열어 놓지 않느냐? 시험을 치르러면 최소한 30분 전에 미리 문을 열어 놓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학교가

유다서(38)

5.7.4. 감사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한 것 역시 저의 사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누가복음의 이 기사를 읽고 생각한 저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눅 17:15-16)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글자그대로 하자면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praising God). 하나님을 칭찬한다고 하는 것이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칭찬이라는 것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잘 했어.”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학생의 답안지나 일기장에 “참 잘했어요.”라는 철수와 영희의 도장을 꽉 찍어주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격려해주는 것이 칭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칭찬하다니요? 여기에서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찬하는 것 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참 잘하셨습니다.” “선생님, 참 잘하셨습니다.” “사장님, 정말 잘하셨습니다.” 옛날을 배경으로 꾸민 사극의 흉내를 내면, “주군,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이런 칭찬 말입니다. 그런 칭찬을 듣는 부모님, 선생님, 사장님, 그리고 주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의 얼굴 표정이 어떨까요? 부모님은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할 겁니다. “내 아들이 나보고 잘했다는군. 자네들은 자식에게 그런 칭찬 들어봤어?”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옆 동료 선생님들에게 자랑을 늘어 놓으실 겁니다. “우리반의 아무개 있지 않습니까? 허허, 그 녀석이 기특하게도…” 하면서 계속 웃습니다. 사장님은 전체 회의에서 그 칭찬한 직원에게 특별한 상을 주실지도 모르지요. 물론 직원이 상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주군은 전쟁에서 승리의 자신감을 얻을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

유다서(37)

5.7.3.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발걸음을 돌려 제사장에게 갑니다. 예수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갑니다. 어떤 이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라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갑니다. 어떤 이는 친구인 나병환자가 가니까 덩달아 같이 갑니다. 어떤 이는 고쳐주시지도 않음을 불평하며 갑니다. 다른 경우에는 손도 잡아주시고 따뜻한 말 한 마디도 하시더니, 우리에겐 그저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다며 투덜대며 갑니다. 어떤 이는 선생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며 반신반의하며 갑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제사장에 가는 것은 일종의 도박입니다. 어차피 죽은 그리고 죽을 목숨이지만, ‘정작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함의 판결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웁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제사장과 시민들의 돌을 맞는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나병환자의 마을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누슨 조화입니까? 가는 길에 그들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됩니다. 친구의 얼굴을 보는데,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새롭게 돋아났습니다. 코가 떨어져 나간 친구의 코가 오똑하게 서있습니다. 자기의 손가락이, 예전에 아내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하던 그 손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을 안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그 손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며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열 걸음을 떼었을 때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생각하자면 예배당에 가는 도중에, 즉 하나님께 돌아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는 것 아닐까요? 투덜대며 가든, 의심하며 가든, 어쨌든 하나님께 돌아가니까 병이 낫습니다. 

유다서(36)

5.7.2. 어느 날 이들에게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비춰집니다. 그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이들의 귀는 문드러져 없지만 그래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예수라는 선생님에게 가 보기로 뜻을 모읍니다. 그러나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선생님입니다. 일반 시민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데, 하물며 명망 높은 선생님이겠습니까? 하기야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로 둘러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희미한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외칩니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겉옷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멀리 서서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Have pity[mercy] on us!)!” 우리의 고백이 아닐까요? 아니 저의 고백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임을 고벡하지 않을래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한 마디 외에 더 무슨 요구가 있겠습니까? 나는 육체의 나병을 지닌 나병환자는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영혼의 나병을 지닌 나병환자입니다. 나의 영혼은 죄와 가증스러움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습니다.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보면 나병의 증상이 금방 나타납니다. 나의 귀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한, 아니 듣지 않는 채로 나병에 걸려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의 눈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는 채로 나병에 걸려 문드러져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나병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그 한 마디 밖에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 한 마디 밖에는…   James Tissot - The Healing of Ten Lepers (Guérison de dix lépre

유다서(35)

5.7.1.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살려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원래 그런 모양입니다. 물론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사람의 탈을 쓴 이상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이, 그 감사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그나마 하루 이틀 감사를 표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남은 삶을 덤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선한(?) 사람들일 겁니다. 두고두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부터 감사를 표하기는 커녕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누가복음에 이런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1-19) 감사에 대한 구절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에서 본 라이프성경사전의 설명에서도 얼마나 많은 구절이 언급되었는지요. 어떤 구절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이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기사를 읽고 감사에 대해, 아니 감사 그 자체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항상 그러듯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

유다서(34)

5.7. 원망과 불평의 반대는 감사일 것입니다. 라이프성경사전의 감사(感謝, thanks)에 대한 설명을 볼까요? 먼저 ‘감사’라는 용어의 원어를 살펴봅니다.  ‘하나님께 자복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으로 ‘야다’라는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5) 예배를 드릴 때 부르는 감사찬양을 ‘토다’라고 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7) 대개 사람 사이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감사한 마음’과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인 ‘유카리스티아’라는 낱말도 있군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바울을 고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행 24:3)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 5:3-4) 특히 여기서는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카리스’라는 낱말도 있습니다. 생각컨대 위에서 본 ‘유카리스티아’는 이 ‘카리스’와 ‘좋은’이라는 뜻의 ‘유’가 합쳐져 만들어진 낱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유다서(33)

5.6.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7:1-7; 민 11; 14; 16). 여러분은 언제 원망하십니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원망해본 적이 있습니까? ‘원망(怨望)하다’는 사전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다.’라는 뜻입니다. grumble은 ‘투덜거리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마실 물이 없으므로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했습니다(출 17:3). 그들은 다투었습니다(출 17:7). 더 나아가 그들은 여호와를 시험했습니다(출 17:2, 7). 물이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불평을 품고 모세를 미워했습니다. 모세에게 투덜거리고, 그것도 모자라 (서로) 다투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없는 것을 내심 나무랐습니다. 순간순간 함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속으로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바로 나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군요.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계산했답니다. 출애굽한 백성이 200만 명이라고 가정하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의 양이… 놀라지 마십시오. 기차 200칸 이상에 빵을 가득 실어 매일 공급했다는 계산 결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40년 동안 말입니다. 나흘도 아니고, 4개월도 아니고, 4년도 아니고, 40년 동안 매일 기차 200량에 빵을 가득 실어 공급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스케일을 상상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그들은, 아니 나는 원망하고, 다투고, 시험했습니다.  Moses strikes water from the stone, by Francesco Bacchiacca 원망이라는 것이 자기의 뜻대로 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겁니다. 나는 어땠을까요? 나의 뜻대로 나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

유다서(32)

5.5.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빚으신 피조물에게 왜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치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대로 청종하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고 또 못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마치 무당에게 복채를 주고 복을 달라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저도 이런 생각이 정말 쓸데없는 망상으로 끝나길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알 섬기듯, 무당에게 머리를 조아리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점집으로 들어가듯 하나님을 생각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포함한 예배의 모든 절차를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복이 임한다고 했지, 복을 위해 청종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한낱 무당과 동급으로 여기는 엄청나게 가증스럽고 역겨운 죄를 매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음란히 섬기는 셈입니다.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출 34:15-16) Offering to Molech (illustration from the 1897 Bible Pictures and What They Teach Us by Charles Foster)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

유다서(31)

5.4. 바른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생각을 한 번 적어보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고, 바알브올에게 가담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렸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바알브올을 섬긴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하더라도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사리 저버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도 장담은 못합니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제 앞에 있고, 화려하게 보이는 해결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을 등질 수도 충분히 있음을 고백합니다.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는 하나님 보다는 화려하고 멋있게 보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섬기는 그 대상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우상도 섬깁니다. 그것이 가증스러운(detestable) 일입니다. 그것이 역겨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상숭배를 가장 극악한 것으로 배웠습니다. 백번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재물도 섬기는 것.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재물(money)를 섬긴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1909 painting The Worship of Mammon by Evelyn De Morgan. 하나님을 재물처럼 섬기는 것 말입니다. 마치 바알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마음

유다서(30)

5.3. 유다의 편지를 계속 읽읍시다.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역시 바울 선생님의 해석을 볼까요?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5-11) 어떤 말로 설명하더라도 바울 선생님의 설명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웬만큼 교회에 다니신 분들은 다 알 겁니다. 그리고 뱀에게 멸망한 이야기도 압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가는 것 같지만, 음행하다가 23,000명이 죽은 것과 원망하다가 멸망한 사건을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고전 10:11),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유 7).  Moab leads Israel into sin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유다서(29)

5.2. 유다서 5절에 기록한 “주(the Lord)”라는 호칭을 어떤 고대 사본에서는 “예수님”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사도 바울이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바울 선생님도 출애굽을 언급하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 저명한 석학마저도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정말 탁월한 해석입니다. 그저 탁월하다는 말 밖에는 더 이상의 할 말이 없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10가지 재앙을 뒤로 하고 이집트를 떠납니다. 다음은 위의 본문을 NLT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그들 모두는 마른 땅 위로 바다(홍해)를 걸어 건너갑니다. 구름과 바다 속에서 그들은 모세의 추종자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령한 음식(spiritual food)를 먹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령한 물(음료, spiritual water)을 마십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 여행하던 신령한 바위(반석, spiritual rock)으로부터 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이라서 이렇게 해석할까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10가지 재앙이든, 혹은 더 많은 재앙을 겪었거나 겪으면서 그 재앙으로부터 탈출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런 구름 속에서 걸어갑니다. 바다 속을 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은혜의 마른 땅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질퍽질퍽한 길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세례임을 압니다. 우리는 배고프다고 불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매일 먹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유다서(28)

Ⅲ.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5-16) 변절자의 심판에 대한 역사적인 예들(5-7) 믿지 않는 이스라엘(5)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유 5) "Crossing of the Red Sea", Nicholas Poussin 5.1.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유다는 수신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다시 생각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5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이스라엘의 역사, 즉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하고 큰 사건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히브리인들은 출애굽한 그 시점을 새해의 첫 달로 삼아 기립니다. 그만큼 출애굽은 그들의 역사에서 글자그대로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너무나 자주 들어서 출애굽의 의미가 반감되는 경우도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아, 또 그 이야기야? 이제 그만 하라고. 다 아는 얘긴데, 뭘 또 새삼스럽게 해?” 이런 식으로 출애굽을 격하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출애굽을 이야기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그리고 손자로 대대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큰 사건이면 3,500년 동안 그 구원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까요? 유다는 그 이야기를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웬만한 선지자들과 어른들은 출애굽을 자자손손 대를 이어 전해줍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망각하는 존재라, 자꾸만 이야기하고 전해줍니다. 전해줄 뿐만 아니라, 기념일을 정하고 매년마다 절기로 지킵니다. 하나님의

유다서(27)

4.2.1.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 거짓 교사들은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비난 때문에 이미 표시된 자들입니다. 새번역은 “성경에는 그들이 받을 심판을 옛날에 미리 적어 놓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 자들은 … 이미 오래 전에 단죄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단죄를 받은 자들이 불법 침입자처럼 교회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경건하지 않습니다(ungodly). 의롭지 않습니다(unrighteous).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 (벧후 2:9)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7)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4.2.2.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licentiousness)으로 바꿉니다. 방탕한 것은 문자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악(unrestrained evil)’ 또는 ‘역겨운 부도덕(gross immorality)’를 뜻합니다. NIV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여 비뚤어지게 한다(pervert)’라고 기록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선한 것, 즉 “우리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our God)”를 비뚤어진 것, 즉 “방탕한 것(a license for immorality)”으로 바꿉니다. 이는 크리스천에게

유다서(26)

B. 주제가 바뀐 이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짓 선생들의 존재(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4.1.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드디어 편지의 목적이 나타납니다. 3절에서 유다가 편지의 내용까지 바꾸어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은 ‘하느님(하나님)을 배반한 몇 사람이 몰래 여러분 가운데 끼여 들어왔다.’고 기록합니다. 새번역은 ‘몇몇 사람이 몰래 숨어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여러 영역본들을 종합해보면 사악한 몇 사람이 불법 침입자처럼 눈에 띄지 않고 부지중에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미끄러져 기어 들어와 잠입하여 스며들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들어온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몰래 숨어 들어왔습니다. 세작(細作)이라는 낱말을 아십니까?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낱말입니다. 현대에는 간첩(間諜, spy)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을 세작 또는 간첩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적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거짓 교사들은 같은 성도인 것처럼 호의를 가장하여 비밀스럽게 활동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유다서(25)

3.6.2. 그러면 믿음이 가져다 주는 복과 은혜는 무엇일까요? 죄사함을 얻습니다(마 9:2; 요 3:18; 행 10:43). 구원을 얻습니다(막 16:16; 행 16:31; 고전 1:21). 정결케 됩니다(행 15:9). 의롭다함을 받습니다(롬 3:22, 28; 빌 3:9). 거룩하게 됩니다(행 26:18). 죽음에서 자유케 됩니다(요 11:25-26).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요 12:46). 생명을 얻습니다(요 20:31). 영생을 얻습니다(요 3:15-16; 딤전 1:16).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 1:12; 롬 8:14-15). 그리스도가 내주하게 됩니다(엡 3:17). 성령의 인치심을 받습니다(엡 1:13).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보존됩니다(요 10:26-29; 벧전 1:5). 약속과 유업을 받습니다다(행 26:18; 히 6:12; 11:33).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 3:1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롬 5:1). 하나님과 동거합니다(요일 4:15-16). 성령을 받습니다(요 7:38-39; 갈 3:2). 영적으로 성장합니다(엡 4:13).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롬 9:33; 10:11; 벧전 2:6). 참사랑을 행합닏다(딤전 1:5). 핍박을 이깁니다(히 11:33-34). 승리를 얻습니다(롬 8:35, 37; 요일 5:4-5). 기쁨과 희락과 평강과 위로를 얻습니다(롬 1:12; 15:13; 벧전 1:8). 안식과 소망을 얻습니다(갈 5:5; 히 4:3; 벧전 1:21). 심판받지 않습니다(요 3:18).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습니다(골 2:12). 그렇다면 이런 믿음이 없는 자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정죄를 받습니다(막 16:16; 요 3:18).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시 78:20-22). 심판받습니다(딤전 5:12). 죄 가운데 죽습니다(요 8:24). 실족합니다(벧전 2:7-8). 거짓 교훈을 따릅니다(딤전 4:1-3). 굳게 서지 못합니다(사 7:8-9).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집니다(롬

유다서(24)

3.6.1. ‘같은 믿음(common faith, 딛 1:4)’은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의 믿음(one faith, 엡 4:5)’은 어떤 믿음일까요? 먼저 라이프성경사전에서 정의한 믿음을 인용하겠습니다.  This illumination from a 13th-century manuscript shows the apostles writing the Creed, receiving inspiration from the Holy Spirit.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이 천지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심을 믿고 그 이루신 일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가르침, 그리고 구속 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재림과 최후의 심판을 확신하고 그분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마지막날까지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영생과 부활과 최후 승리를 확신하는 것(행 1:11; 롬 10:9; 고전 15:3-4; 빌 3:10-11; 살전 4:14; 요일 5:1)입니다. 이런 믿음의 내용들을 요약, 신앙 고백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더욱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의 차원을 넘어 구세주 예수를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삶의 방향을 그분에게로 전환하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절대 신앙하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믿음을 소유한 자는 은혜를 덧입은 자요 변화된 신분으로서 항상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겸손히 그분의 도우심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삶(행위)을 통해 그 믿음을 확증하며 때론 주님을 위해 고난에 동참하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산 믿음이요, 믿음을 완성해 가는 길입니다(롬 8:11; 고후 3:17-18; 히 11:1; 약 2:26; 벧후 3:13-14). 이 믿음을 거부하는

유다서(23)

3.5. 모세와 불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모세가 에디오피아인들과 싸운 경위의 일부분을 옮깁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있었을 때 에디오피아인들이 이집트를 침략해서 이집트인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에 이집트인들은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집트의 서기관들은 모세의 용맹으로 적을 물리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모세가 전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히브리인들의 서기관들은 장차 모세가 그들의 장군이 되면 이집트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모세는 적들이 그의 공격을 알아차리기 전에 군대를 거느리고 적들을 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로가 아니라 육로로 행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육로로 행군하면서 그의 지혜가 매우 뛰어남을 실증해 보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 뱀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식력이 뛰어나며 독성이 특히 강한 데다 보기에도 유달리 흉측해 보였습니다. 어떤 뱀은 눈에 띄지 않게 땅에 숨어 있다가 솟아 올라 공중을 날아 부지중에 사람을 덮쳐 해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육로로 통과하기가 어려운데, 모세는 군대가 해를 입지 않도록 무사하게 보호하는 멋진 계책을 창안해 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초(sedge)로 방주 모양의 바구니를 만들고 그 속에 이베스(ibes)라는 새들을 담아 들고 갔습니다. 이 새는 뱀들에게는 최대의 천적인데, 이 새들이 접근하면 뱀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뱀들은 도망을 치다가 이베스에 의해 잡혀 먹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베스는 길들여진 동물이며 단지 뱀 종류에게만 해를 끼쳤습니다. 모세는 이런 뱀들이 서식하는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이베스를 풀어 놓아 뱀들을 물리쳤고 군대가 그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이베스를 이용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행군을 거듭해 에디오피아인들이 예상하기도

유다서(22)

3.4. 구원과 믿음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도 빠지지 않고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고, 축구경기장에도 “John 3:16”이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합니다. 자동차 범퍼용 스티커로는 이미 수도 없이 팔렸습니다. 새로운 전화번호를 5316(요 3:16)이라고 일부러 정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암송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지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암송할 겁니다. 저는 평소에 이 구절을 읽거나 생각할 때마다 ‘이처럼’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앞의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갑자기 웬 모세(Moses)? 갑자기 웬 뱀?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3,500년 전의 민수기(Numbers)로 잠깐 가볼까요? 어차피 한번쯤은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니까요.  Moses lifts up the brass serpent, curing the Israelites from poisonous snake bites in a painting by Benjamin West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들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

유다서(21)

3.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으니, ...”  구원에 대한 편지를 쓰려다가 갑자기 믿음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를 씁니다. 유다는 그 믿음을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성도들에게 한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이라고 기록합니다. 새번역에는 ‘성도들이 단번에 받은 그 믿음’이라고 기록합니다. ‘한번’ 또는 ‘단번에’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어설픈 저의 설명보다는 다음 구절들을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The Crucifixion. Christ on the Cross between two thieves. Illumination from the Vaux Passional, 16th century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 7:27)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1-12)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유다서(20)

A bumper sticker asking if one has found salvation 3.2.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질문 자체가 과거형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딴지를 걸 마음은 없습니다. 특별히 다음 구절들을 살펴볼까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1)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벧전 1:5) ‘구원을 이루라(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빌 2:12),’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our salvation is nearer now than when we first believed; 롬 13:11),’  그리고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the coming of the salvation that is ready to be revealed in the last time; 벧전 1:5)’이라는 표현을 보면 현재의 구원과 미래의 구원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그리고 미래의 구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만 들어본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어떤 이들은 몇 년 몇 월 몇 일에 구원받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시간까지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분들을 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부럽다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궁금증입니다. 부럽다는 것은 저의 믿음이 약하고, 아니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분들의 경지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궁금하다는 것은 위의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