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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6)


5.7.2. 어느 날 이들에게 한 줄기 희미한 빛이 비춰집니다. 그 마을에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이들의 귀는 문드러져 없지만 그래도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예수라는 선생님에게 가 보기로 뜻을 모읍니다. 그러나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선생님입니다. 일반 시민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데, 하물며 명망 높은 선생님이겠습니까? 하기야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로 둘러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희미한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외칩니다.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고, 가까이 갈 수도 없습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겉옷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멀리 서서 말을 건넬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Have pity[mercy] on us!)!” 우리의 고백이 아닐까요? 아니 저의 고백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임을 고벡하지 않을래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한 마디 외에 더 무슨 요구가 있겠습니까? 나는 육체의 나병을 지닌 나병환자는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영혼의 나병을 지닌 나병환자입니다. 나의 영혼은 죄와 가증스러움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습니다.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을 보면 나병의 증상이 금방 나타납니다. 나의 귀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한, 아니 듣지 않는 채로 나병에 걸려 귀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의 눈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아니 보지 않는 채로 나병에 걸려 문드러져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나병환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그 한 마디 밖에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그 한 마디 밖에는…  

James Tissot - The Healing of Ten Lepers (Guérison de dix lépreux) - Brooklyn Myseum

제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냅니다. “아니, 나병환자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이 분이 누구라고 귀찮게 하는거야?” “썩 물러가라.” “예수님, 제가 쫓아내겠습니다.” “저들을 쫓아내라.” 어떤 성급한 사람은 이미 돌을 손에 쥐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나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좀 다녔다고 해서, 교리를 좀 안다고 해서, 목사님과 좀 친하다고 해서, 이런저런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봉사 좀 한다고 해서, 전도상을 받았다고 해서, 금식기도를 자주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나병환자 보듯이 하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잣대―그것도 어설프게 알고 있는―를 다른 이들에게 호되게 들이대는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전혀 뜻 밖입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희가 나음을 원하느냐?”라고 물어보시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기본적인(?) 질문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그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이미 예수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연민(pity,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예수님의 온 몸과 마음에 차고 넘쳤습니다. 그들의 고통에 예수님의 마음과 몸이 조각조각 찢겨나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그들이 되신 것입니다. 저는 정말 상상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다른 이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길 수 있는지 상상하기 힘듭니다. 약간의 연민, 동정심, 불쌍하다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 그 나병환자의 나병이 예수님의 팔과 가슴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의 피부에 나병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실 때, 그 혈루병이 예수님으로 옮겨가 예수님은 피를 흘리십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실 때, 그 귀신이 예수님에게 달라붙습니다(너무 심한 상상인가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가셨을 때, 그 죽음이라는 놈이 예수님에게 들러 붙었습니다. 공상과학영화에나 나올 법한 상상을 해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타인의 고통을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나의 가증스러움과 아둔함과 어리석음을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몸에 있는 그 긍휼로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워서 말씀하십니다.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나은 것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새 삶을 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새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레위기에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가 있습니다(레 13:1-14:5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율법대로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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