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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51)


8.2. … 육체를 더럽히며, ... 

육체를 더럽힙니다(defile the flesh[KJV], pollute their own bodies[NIV]). 앞에서 보았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관계를 맺어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들이 다른 신을 따라가며 섬기고 절하면서 육체를 더럽혔습니다. 이단들의 뉴스를 들으면 가끔 그런 뉴스까지 들립니다. 연약한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 말입니다.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가장 약한 자들 중의 하나인 여인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말입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쥐꼬리만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도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요즘 말로 갑질한다고 하죠. 약자들을 그냥 두어도 모자랄 판에 갑질합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9-10)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앞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좋겠지만, 최소한 이 구절에 의하면, 음행(sexual immorality), 우상 숭배(idolatry), 간음(adultery), 탐색(male prostitution), 남색(homesexual offend), 도적(thievery), 탐욕(greed), 술취함(drunkenness), 모욕(slander), 속여 빼앗음(사기, swindle) 등은 사악한 것들(불의, wickedness)입니다. 모두 육체를 더럽히는 데 앞장서는 것들입니다. 이런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이러한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위에서 빌 마이어스(Bill Byers)의 <Fire of Heaven>이라는 소설을 언급했습니다.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인 브랜든(Brandon)이 새라(Sarah)라는 여자와 결혼합니다. 시골 청년인 브랜든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도 이런저런 실패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새라는 브랜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여자인데, 신경학계의 탁월한 젊은 과학자입니다. 이 새라 역시 우여곡절이 많은 여자입니다. 대학에 다닐 때 잘못된 판단으로 낙태까지 하고,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연구에만 몰두합니다. 지금 소설의 내용입니다. 그 두 사람이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부가 되었음에도 그들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새라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은 잠시 헤어집니다. 브랜든은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순례자의 삶을 삽니다. 새라는 전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루카스 폰테(Lucas Ponte)라는 사탄의 하수인에게 갑니다. 루카스가 신경학계의 탁월한 과학자를 필요로 해서 새라를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루카스는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그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립니다. 새라는 자살까지 시도하지만, 브랜든이 살려냅니다. 나중에 새라는 철저히 회개하고 브랜든과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아름다운 부부가 됩니다. 그리고 남편 브랜든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 두 부부는 부활합니다.

A pair of wedding rings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는 신부인 우리의 순결을 요구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부인 우리는 온갖 죄로 더렵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돌아가기만 하면,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마치 새라가 회개하고 남편인 브랜든에게 돌아가서 진짜 부부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전 6:11) 

내가 불의한 자였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나는 씻겨지고(was washed) 거룩해졌고(was sanctified) 그리고 의로워졌습니다(was justified). 내가 스스로 씻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by the Spirit of our God) 이루어진 것입니다. 철저한 수동입니다. 위대한 수동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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