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서 1절 하반절에서 유다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밝힙니다. 부르심을 받은자?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그리고 그 부른 이는 무엇때문에 불렀을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고 시키실 일이 있어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사랑을 얻은 자입니다. 내가 사랑을 주는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사랑을 얻는 입장(beloved)입니다. 어디에서 사랑을 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in God the Father)입니다. 저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하면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 로마서 8장 28절의 구절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리지만, 좁은 저의 생각으로는 동시에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인데, 과연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가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너는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다시 말해 너의 모든 것으로, 너의 모든 됨됨이로, 너의 모든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모든 존재는 커녕 일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커녕 생각이라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생각마저도 제대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9).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웃은 커녕 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악과 불순종으로 가득한 제 자신을 사랑하는 것부터가 불가능임을 압니다. 첫 단추인 제 자신이 강퍅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고통이나 눈물을 보면서도, 소 닭보듯이 하는 제 자신이 밉고 또 밉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제 자신을 사랑하기는 커녕, 아무런 느낌도 없는 제 자신이 밉고 또 밉습니다.
거꾸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주시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악하고 완악한 존재인 제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 불가사의 중에 불가사의입니다. 그렇게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은 휘황찬란한 빛이지만, 동시에 어둡고 컴컴한 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온전하고 완전하신 거룩하심에 다다를 수 없는 완악한 제 자신의 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이루기 불가능한 것을 이루라고 명령하셨을까?’라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다서에서는 약간 다릅니다.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고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가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이나 유다서의 말씀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겟습니다만, 저는 그 문장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내가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고 그렇게 해야겠습니다만, 유다는 한 발 물러서서 수동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are beloved)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KJV(King James Version)는 ‘are sanctified’이라고 번역했습니다. sanctify는 ‘신성하게 하다,’ ‘정당화하다,’ 또는 ‘인가[재가]하다’라는 뜻입니다. sanctify는 라틴어 동사 sanctificare에서 왔는데, sanctus(거룩)와 facere(만들다)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즉 ‘거룩하게 만든다’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시 150:1)인 ‘성소(聖所)’를 sanctuary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신성하게 됩니다. 창조주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하늘 아버지에 의해 인가받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능동이든 수동이든 의미는 같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수동태가 좀 더 와닿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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