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 그러면 믿음이 가져다 주는 복과 은혜는 무엇일까요? 죄사함을 얻습니다(마 9:2; 요 3:18; 행 10:43). 구원을 얻습니다(막 16:16; 행 16:31; 고전 1:21). 정결케 됩니다(행 15:9). 의롭다함을 받습니다(롬 3:22, 28; 빌 3:9). 거룩하게 됩니다(행 26:18). 죽음에서 자유케 됩니다(요 11:25-26). 어두움에 거하지 않습니다(요 12:46). 생명을 얻습니다(요 20:31). 영생을 얻습니다(요 3:15-16; 딤전 1:16).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 1:12; 롬 8:14-15). 그리스도가 내주하게 됩니다(엡 3:17). 성령의 인치심을 받습니다(엡 1:13).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보존됩니다(요 10:26-29; 벧전 1:5). 약속과 유업을 받습니다다(행 26:18; 히 6:12; 11:33). 하나님께 나아갑니다(엡 3:12).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롬 5:1). 하나님과 동거합니다(요일 4:15-16). 성령을 받습니다(요 7:38-39; 갈 3:2). 영적으로 성장합니다(엡 4:13).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롬 9:33; 10:11; 벧전 2:6). 참사랑을 행합닏다(딤전 1:5). 핍박을 이깁니다(히 11:33-34). 승리를 얻습니다(롬 8:35, 37; 요일 5:4-5). 기쁨과 희락과 평강과 위로를 얻습니다(롬 1:12; 15:13; 벧전 1:8). 안식과 소망을 얻습니다(갈 5:5; 히 4:3; 벧전 1:21). 심판받지 않습니다(요 3:18).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습니다(골 2:12).
그렇다면 이런 믿음이 없는 자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정죄를 받습니다(막 16:16; 요 3:18).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시 78:20-22). 심판받습니다(딤전 5:12). 죄 가운데 죽습니다(요 8:24). 실족합니다(벧전 2:7-8). 거짓 교훈을 따릅니다(딤전 4:1-3). 굳게 서지 못합니다(사 7:8-9).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집니다(롬 11:20; 히 3:12).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민 20:12; 신 1:32-25; 히 3:18-19). 하나님께서 멸하십니다(유 1:5). 하나님 앞에서 제함을 받습니다(왕하 17:14, 18; 시 106:27). 둘째 사망에 이릅니다(계 21:8).
좀 길지만 라이프성경사전에 나와있는 믿음에 대한 내용을 옮겨보았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군요. 한번쯤은 이런 정리가 필요할 듯해서 인용했습니다.
3.7. 공통의 구원, 즉 같은 믿음, 하나의 믿음이 뭐길래 유다가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했을까요? 믿음은, 특히 ‘단번에’ 주신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로부터 전해진 크리스천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입장에서 지불하신 속죄의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 그리스도의 재림 등을 말합니다. 특히 유다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생활이 믿음입니다.
유다는 원래 ‘공통의 구원’에 대한 긍정적인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 양떼를 위협하는 늑대들로 초점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낱말까지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이 ‘싸우다(contend)’는 낱말은 ‘철두철미한 노력을 행사하여 분투하다’라는 뜻입니다. 라틴어의 강조접두사 con과 ‘뻗다(stretch)’라는 뜻의 라틴어 tendere가 결합되어 ‘뻗치다(stretch out),’ 또는 ‘분투하다(strive after)’이라는 contendere에서 나온 낱말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 선수처럼, 싸우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 경기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Timothy)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싸우기는 싸우되 특히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싸우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절실했기에, 구원에 관하여 편지하려는 생각을 접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주제로 바꾸었을까요? 그리고 유다는 그런 편지로 성도들을 권하여야 할(compelled to write and urge) 필요를 느꼈다고까지 말합니다. 무엇이 급하고 위기감을 느꼈길래,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초대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의 동생인 유다가 왜 이렇게 급하게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편지를 써야만 했을까요? 얼마나 급하고 중대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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