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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t van Rijn, 1626.

아침에 발락과 발람이 산당에 올라 여호와께 제단을 쌓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이 발람에게 임합니다. 발락은 장소를 바꾸어서 제단을 쌓고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부탁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발람에게 주십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발락은 다시 장소를 옮겨 브올 산 꼭대기에서 제단을 만듭니다. 발람은 세 번째 축복의 예언을 합니다. 드디어 발락도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마지막 예언을 합니다. 역시 이스라엘에게는 축복이지만, 아말렉과 겐 족속에게는 저주의 예언입니다. 그렇게 발람과 발락은 헤어집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the wages of wickedness)을 사랑했습니다. 그나마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미친 선지자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요? 발락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안위와 평안을 추구합니다. 발락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복채를 주면서까지 발람을 끌어들입니다. 나는 발락이 아닙니까? 여러번 고백하지만, 저의 번민이 이것입니다. 나의 안위와 평안, 곧 소위 말하는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말입니다. 발락이 하는 행동을 보면 하나님을 무당 섬기듯 섬기는 것을 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음란히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자체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자체로 만족하고 기뻐할 수는 없을까요?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벧후 2:13)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얼마나 자주 이 말을 잊고 사는지요? 사도 베드로는 불의의 삯을 추구하면 그 불의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낮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 놉니다. 마치 베짱이처럼 말이죠. 그들의 삶은 얼룩(점, blots)과 티(흠, blemishe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롬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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