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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40)


5.7.6. 예수님의 반응을 보실까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눅 17:17-18) 

분명히 예수님은 열 명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열 명 모두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보다 더 우월하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전 인구의 90 퍼센트가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너무 무리한 해석인가요? 아니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 90 퍼센트에 대해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최소한 저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하루의 생활 중에 이런 일 저런 일 등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중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의 비율로 감사를 표할까요? 물론 계량적으로 수치를 가늠하기가 어렵지만, 이 나병환자의 예에서처럼 10 퍼센트만이라도 하나님을 칭찬하면 될텐데 말입니다. 그 10 퍼센트가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처럼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느 정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전 인구의 10 퍼센트만이 감사를 표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나병환자를 다 고쳐주셨습니다. 나머지 나병환자들이 이방인, 즉 사마리아인이었는지 유대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유대인이었지 싶습니다. 그러니 “이 이방인 외에는…”이라고 말씀하셨겠지요. 비록 사마리아 땅을 거치지 않고 둘러서 가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 은혜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결정적인 선언이 뒤따릅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 17:19) 

예수님은 감사를 보시고 믿음(faith)이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Message는 “너의 믿음이 너를 치료하고 너를 구원했다(Your faith has healed and saved you.).”라고 기록합니다. 감사의 파장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칭찬하는 말 한마디가 믿음과 구원까지 이르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출발은 감사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출발은 감사라는 것입니다. 이제 10 퍼센트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칭찬합시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자, 이제 다시 유다서로 돌아갑니다.

5.8. 저는 우상숭배, 음행, 시험, 원망, 불뱀 등을 말씀드렸지만, 유다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선언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유 5) 

하나님을 바알을 섬기듯이 섬기는 것, 한낱 무당과 동급으로 두는 것, 그 자체가 믿음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다른 존재에게도 한 발을 걸쳐놓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다른 존재에게 복을 빌려는 가증스러운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내가 하나님을 움직여 복을 받으려는 그 사악하고 완악한 동기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이 이어집니다. 쥐꼬리만한 믿음은 커녕, 성경말씀처럼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도 없다는 것이지요(마 17:20; 눅 17:6). 결국은 믿음이란 이야기이지요.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5-19)

그렇게 믿음이 없는 자들은 다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과 은혜를 믿지 못하는 이 비참한 현실을 앞에 두고, 이름 모를 아이의 아버지처럼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 

믿음 없음을 도와주시기를 기대하며,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울(유 3) 용기를 기대하며 다음 구절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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