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출 17:1-7; 민 11; 14; 16). 여러분은 언제 원망하십니까? 아니, 질문이 잘못되었군요. 원망해본 적이 있습니까? ‘원망(怨望)하다’는 사전적으로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을 품고 미워하다.’라는 뜻입니다. grumble은 ‘투덜거리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마실 물이 없으므로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했습니다(출 17:3). 그들은 다투었습니다(출 17:7). 더 나아가 그들은 여호와를 시험했습니다(출 17:2, 7). 물이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불평을 품고 모세를 미워했습니다. 모세에게 투덜거리고, 그것도 모자라 (서로) 다투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없는 것을 내심 나무랐습니다. 순간순간 함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속으로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바로 나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군요. 하나님께서 매일 만나를 내려주셨는데,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할 일 없는(?) 사람이 계산했답니다. 출애굽한 백성이 200만 명이라고 가정하고,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의 양이… 놀라지 마십시오. 기차 200칸 이상에 빵을 가득 실어 매일 공급했다는 계산 결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40년 동안 말입니다. 나흘도 아니고, 4개월도 아니고, 4년도 아니고, 40년 동안 매일 기차 200량에 빵을 가득 실어 공급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스케일을 상상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그들은, 아니 나는 원망하고, 다투고, 시험했습니다.
Moses strikes water from the stone, by Francesco Bacchiacca
원망이라는 것이 자기의 뜻대로 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겁니다. 나는 어땠을까요? 나의 뜻대로 나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원망했던 겁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겁니다. 아니, 지금도 원망하고 다투고 시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계획을 세워놓고 그대로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대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생각은 더 고차원적이고 더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음을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원망이라는 것도 좋든 나쁘든 관계 속에 있는 둘 이상의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니까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원망할 것도 없지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소 닭보듯이 하는 것 아닐까요? 분명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도 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겠다고 마음도 먹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겠다고 결단도 합니다. 그러니 만나를 내려주십사고,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구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저의 고민이 바로 그것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이용하는 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격적인 구원과 은혜를 모르고 그저 복받기만을 생각하는 제 자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저나 똑같은 존재이며, 광야에서 멸망할 존재입니다. 그들은 40년 동안 항상 눈에 보이게 함께 하시는, 전문적인 용어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만나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달픈 세상에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Immanuel)을 경험합니다. 역시 전문적인 용어로 체험한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다툼과 시험이 시시때때로 일어납니다. 시험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물론 쓸 것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해야겠지요.
문제는 그 근원적인 동기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나의 배부름을 위해 구하는 것인가? 나의 배고픔을 빙자해서 하나님을 이용하지는 않는가? 창조주이며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이용하셔야지, 어째서 내가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좁고 좁은 나의 이기심과 배부름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다는 말인가? 바알을 섬기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상천하지에 홀로 주재이신 하나님을 한낱 무당과 동급으로 여기고 이용하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복채를 주면서 잡신을 조정하려는 것과 도대체 뭐가 다른가? 온전―이 낱말의 온전한(?) 뜻조차 모르겠습니다만―하고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찌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창조주께서 나를 이용하셔야 할 터인데, 피조물인 내가 창조주인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과 다툽니다.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제발 저의 생각이 한낱 잘못된 망상으로 끝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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