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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0)


18.2. 이 마지막 때에 경건하지 않은 욕망을 따르며 조롱하는 자들(mockers[KJV, NASB], scoffers[NIV, ESV])이 있을 것입니다. ‘조롱(嘲弄)하다’는 ‘비웃거나 깔보면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은 ‘기롱(譏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롱하다’는 ‘실없는 말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조롱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많은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옮깁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상상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비웃고 깔보면서 놀리면, 아버지를 실업는 말로 놀리면, 그렇게 조롱하는 자식의 눈이 까마귀에게 쪼인답니다. 독수리가 와서 그 시체의 살점을 새끼에게 먹이로 준답니다. 거의 공포영화 수준입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 17:5)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 14:31)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비웃음까지 당합니다. 버스비가 없어서 부르튼 발을 끌며 걸어가는데, 깔보는 시선까지 느껴집니다. 자식을 학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놀림을 받습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Édouard Manet, Jesus Mocked by the Soldiers, c. 1865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戲弄)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 27:26-31)

‘희롱(戲弄)하다’도 비슷한 뜻입니다.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리다’ 또는 ‘손아귀에 넣고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라는 말입니다. 조롱(기롱, 희롱)의 전형적인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紅布, scarlet robe)를 입혔습니다. 아시다시피 붉은 색은 부와 권력의 상징입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해서 홍포를 입혔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crown of thorns)을 씌웠습니다. 왕관이 아닌 가시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갈대(reed[KJV], [NASB]; staff[NIV])를 주었습니다. ‘규(圭, scepter)’라는 낱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개역한글판은 ‘홀(笏)’이라고 했는데, 권위의 상징으로 왕이 손에 잡고 있는 단장 또는 패(삼하 7:14)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왕의 통치와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지요(시 45:6).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 ‘쉐베트’는 ‘지팡이,’ ‘막대기’라는 뜻으로, 왕의 지시봉 이외에 장군의 지휘봉(삿 5:14), 목자들의 구부러진 지팡이(레 27:32; 시 23:4), 자녀를 훈계하는 회초리(잠 10:13), 측량 도구의 일종인 자(시 74:2; 렘 10:16) 등 그 의미가 다양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규’는 오직 왕에게만 사용되며, 장차 왕으로 오실 메시야 예언에도 상징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민 24:17). 이런 규 대신에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갈대(또는 막대기)를 쥐어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처참하게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 만세!”라는 뜻입니다. 정말 왕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닌 것을 여러분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군병들은 예수께 침을 뱉습니다. 갈대를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그 후에 홍포를 벗기고 예수님의 옷을 도로 입혔습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장으로 끌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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