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
거짓 교사들은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래 전에 비난 때문에 이미 표시된 자들입니다. 새번역은 “성경에는 그들이 받을 심판을 옛날에 미리 적어 놓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 자들은 … 이미 오래 전에 단죄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단죄를 받은 자들이 불법 침입자처럼 교회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경건하지 않습니다(ungodly). 의롭지 않습니다(unrighteous).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 (벧후 2:9)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7)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4.2.2.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들은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licentiousness)으로 바꿉니다. 방탕한 것은 문자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악(unrestrained evil)’ 또는 ‘역겨운 부도덕(gross immorality)’를 뜻합니다. NIV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여 비뚤어지게 한다(pervert)’라고 기록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선한 것, 즉 “우리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our God)”를 비뚤어진 것, 즉 “방탕한 것(a license for immorality)”으로 바꿉니다. 이는 크리스천에게 끝없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거짓 교사들은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방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순간의 쾌락이나 편안함 등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담(Adam)과 하와(Eve) 이후로 이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 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눈―물론 육신의 눈입니다만―으로 볼 수 없으니,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에게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히 1:1)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유혹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해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한 말인가요? 유다서 4절에 의하면, 경건하지 않은 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왜곡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심하고 엄격한 잣대인가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딛 1:1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을 가증한(detestable) 자들이라고 합니다. 복종하지 않는(disobedient) 자들이라고 합니다. 어떤 선한 일에도 적합하지 않는(unfit) 자들이라고 합니다. ‘가증스럽다’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몹시 싫어하거나 미워하고 혐오스러워 하다.’라는 뜻이군요. 역겨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한때 어느 사극에서 왕비(어떤 드라마인지 그리고 배우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가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대사를 자주 내뱉았습니다. 당연히 역겨운 표정의 연기를 하면서 말입니다. 어쨌거나,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경우를 바울 선생님은 이렇게 무서우리만큼 질책합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 이 사자성어를 좀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요. 신행일치(信行一致)! 따지고 보면 위에서 말씀드린 이런저런 변명은 글자그대로 변명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부인하는 것입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14)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이루는 방법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 뿐입니다. 다음 구절을 보기 전에 한 번 더 기억합시다. 거짓 선생들의 3가지 특징입니다. 1) 경건하지 아니하여, 2)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3)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자, 다음 구절들을 계속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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