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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7)


5.7.3.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발걸음을 돌려 제사장에게 갑니다. 예수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길을 갑니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갑니다. 어떤 이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라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갑니다. 어떤 이는 친구인 나병환자가 가니까 덩달아 같이 갑니다. 어떤 이는 고쳐주시지도 않음을 불평하며 갑니다. 다른 경우에는 손도 잡아주시고 따뜻한 말 한 마디도 하시더니, 우리에겐 그저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셨다며 투덜대며 갑니다. 어떤 이는 선생님이 가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며 반신반의하며 갑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제사장에 가는 것은 일종의 도박입니다. 어차피 죽은 그리고 죽을 목숨이지만, ‘정작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함의 판결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스러운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웁니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제사장과 시민들의 돌을 맞는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나병환자의 마을로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누슨 조화입니까? 가는 길에 그들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됩니다. 친구의 얼굴을 보는데,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새롭게 돋아났습니다. 코가 떨어져 나간 친구의 코가 오똑하게 서있습니다. 자기의 손가락이, 예전에 아내의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하던 그 손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딸을 안고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그 손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며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열 걸음을 떼었을 때 그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생각하자면 예배당에 가는 도중에, 즉 하나님께 돌아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는 것 아닐까요? 투덜대며 가든, 의심하며 가든, 어쨌든 하나님께 돌아가니까 병이 낫습니다. 

따지고 보면 투덜댄다 하더라도, 의심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것을 더 크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해서 가는 그 발걸음을 더 높이 사시는 것 같습니다. 하기야 투덜대며 의심하는 마음이 있지만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는 그 자체가 순종이요 겨자씨만한 믿음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왕이면 확고한 믿음과 순종으로 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마저도 하나님께서는 알고 이해해 주십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몸이 제대로 돌아온 것을 보는 그들의 눈도 더 이상 나병에 시달리는 눈이 아닙니다. 똑똑한 눈으로 자기와 친구들의 변화를 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구절이 나타납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눅 17:15-16)

제사장이 있는 성전으로 가야 할 나병환자 한 명이 돌아옵니다. 사적인 견해를 하나 더 붙입니다. 저는 현대의 성도들이 교회를 ‘성전(temple)’이라고 부르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밝힙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성전이지요. 이 세상에서 성전은 하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나마 그 성전은 이미 파괴되어 제사를 드리지도 않고 제사장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는 성전이 아니라 ‘교회(church)” 또는 ‘예배당(chapel)’에서 예배를 드리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다시 오심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성전’이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전의 의미보다는 예배당 또는 교회의 의미가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하실 분들이 많을 줄 압니다. 그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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