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그러니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모양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3-17)
사도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믿음과 들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연결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 53:1)
이사야의 이 질문 앞의 52장 13절부터 53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부터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더러 하나님의 침묵이 있었던 경우도 있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이든 또는 듣기 거북한 말씀이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결정적으로 2,000여 년 전에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요 1:14). 그리고 그 말씀은 이 땅에서 30여 년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의 사도와 교부와 제자들을 통해 그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을 통해 듣습니다. 그 말씀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됩니다. 욥(Job)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Job by Léon Bonnat (1880)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 42:1-6)
나는 나름대로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여 말하지만, 그 말이 이치를 가립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뱉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나로 하여금 알게 하십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께서 나의 귀를 열어주셔야 가능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귀를 열어주시는 은혜를 받으면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나의 입에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회개와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이 경지까지 가고 싶습니다. 나의 눈을 여소서. 나의 귀를 여소서. 나의 마음을 여소서.
이곳 저곳 돌아다녔습니다. 자, 유다서 6절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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