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35)


5.7.1.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살려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원래 그런 모양입니다. 물론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사람의 탈을 쓴 이상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이, 그 감사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그나마 하루 이틀 감사를 표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남은 삶을 덤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 선한(?) 사람들일 겁니다. 두고두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부터 감사를 표하기는 커녕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누가복음에 이런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1-19)

감사에 대한 구절이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에서 본 라이프성경사전의 설명에서도 얼마나 많은 구절이 언급되었는지요. 어떤 구절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이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이 누가복음의 기사를 읽고 감사에 대해, 아니 감사 그 자체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항상 그러듯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중간의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면 가장 빠릅니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힘겹게 돌아 둘러가셨을까요? 나중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어쨌거나,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납니다. 그 당시 나병환자가 마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돌아다닌다고 해도 고개를 푹 숙이고, 겉옷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쓰고, 두려운 마음으로 다녔을 겁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들키면 쫓겨나는 것은 예사이며, 심하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꽤 오래 전에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허준>이 있었습니다. 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 드라마에서 주인공 허준이 나병환자 마을에서 그들을 보살피며 치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나병환자들 중에 상화(나중에 허준의 제자가 됩니다)라는 한 젊은이가 사랑하는 여동생 수연(친동생은 아닙니다)이를 데리고 그 마을 떠납니다. 그들은 다른 마을에서 심하게 매를 맞고 거의 죽을 뻔 합니다. 그때 허준이 나타나 그들을 구해 다시 나병환자의 마을로 돌아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는 마을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이 나병환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열 명의 나병환자입니다. 상상하시겠습니까?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영화 <벤허(Ben Hur)>를 보면,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환자가 되어 마을에서 쫓겨납니다. 나병환자들만 모여 사는 곳에 격리 수용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예루살렘 시내로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겠다는 의도로 말이죠. 그러나 마침 그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즉 사형집행날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나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가고, 어떤 이들은 돌을 던집니다. 벤허는 자기가 돌을 맞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호하지요. 

어쨌거나, 예수께서 지나가시던 동네가 나병환자들의 그런 동네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동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열 명의 나병환자에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저 숨이 붙어있으니까 사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다가와서 손은 커녕 말 한마디 건네지 않습니다. 모두 그들을 저주하고 몹쓸 것을 보는 듯한 눈길을 보냅니다. 저쪽 골목에 이 나병환자의 아내가 보입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매일 같이 손잡고 기도하던 아내입니다. 그러나 그 아내의 얼굴엔 절망감과 한이 맺혀 있습니다. 아니,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옆에 천진난만한 어린 딸이 엄마의 손을 붙잡고 걸어옵니다. 매일같이 무등을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던 딸입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는 자신의 딸에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자신의 딸에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떨어져 나갔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는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딸을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절망과 분노의 눈물을 함께 쏟아냅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수도 없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같이 있는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이미 포기하고 여러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어떤 이는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는 부러움과 한과 절망과 분노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81)

13.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선생에 대한 유다의 마지막 은유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휘황찬란한 인공의 조명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나 또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캄캄한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말입니다. 막 쏟아지려고 하는 그 수많은 별들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유성(별똥별이라고 하죠?)이 지나가는 것도 사진에 담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지구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를 위해 수많은 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14-19) 큰 광명체는 태양일 것이고, 작은 광명체는 달이겠지요. 그리고 별들을 만드셔서 우주 전체의 별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1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다른 천체들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지구의 나이는 45~6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지구가 먼저 창조되고 해·달·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t van Rijn, 16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