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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1)


5.4. 바른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생각을 한 번 적어보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고, 바알브올에게 가담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렸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바알브올을 섬긴다고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하고 불순종하더라도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그렇게 쉽사리 저버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도 장담은 못합니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제 앞에 있고, 화려하게 보이는 해결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을 등질 수도 충분히 있음을 고백합니다. 투박하고 거칠게 보이는 하나님 보다는 화려하고 멋있게 보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섬기는 그 대상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우상도 섬깁니다. 그것이 가증스러운(detestable) 일입니다. 그것이 역겨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상숭배를 가장 극악한 것으로 배웠습니다. 백번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재물도 섬기는 것.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재물(money)를 섬긴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1909 painting The Worship of Mammon by Evelyn De Morgan.

하나님을 재물처럼 섬기는 것 말입니다. 마치 바알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엉뚱한 것을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사리사욕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나의 마음 속에 나의 욕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수시로 봅니다. 말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고 나의 욕심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 깊숙한 곳에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앞에서 고백했듯이 그것마저도 잘 되지 않습니다만, 이웃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경박하고 천박한 마음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성경 도처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복을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창 1:28).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신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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