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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29)


5.2. 유다서 5절에 기록한 “주(the Lord)”라는 호칭을 어떤 고대 사본에서는 “예수님”이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사도 바울이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바울 선생님도 출애굽을 언급하며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합니다. 그 저명한 석학마저도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정말 탁월한 해석입니다. 그저 탁월하다는 말 밖에는 더 이상의 할 말이 없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10가지 재앙을 뒤로 하고 이집트를 떠납니다. 다음은 위의 본문을 NLT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합니다. 그들 모두는 마른 땅 위로 바다(홍해)를 걸어 건너갑니다. 구름과 바다 속에서 그들은 모세의 추종자로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령한 음식(spiritual food)를 먹습니다. 그들 모두는 신령한 물(음료, spiritual water)을 마십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 여행하던 신령한 바위(반석, spiritual rock)으로부터 물을 마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바위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히브리인이라서 이렇게 해석할까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10가지 재앙이든, 혹은 더 많은 재앙을 겪었거나 겪으면서 그 재앙으로부터 탈출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저런 구름 속에서 걸어갑니다. 바다 속을 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은혜의 마른 땅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질퍽질퍽한 길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활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세례임을 압니다. 우리는 배고프다고 불평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매일 먹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공급하지 않으신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마르다고 원망하니까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우리가 마시게 하십니다. 그 물의 근원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물을 공급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녀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구름과 바다를 지날 때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으면 우리는 끝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례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만나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물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있긴 있습니다. 그 재앙으로부터 탈출하겠다는 발걸음입니다. 탈출해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셔야지 가능합니다. 죄로 철저히 무장된 나로서는 생각조차 못할 일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이 없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출애굽은 소위 말하는 믿는 이들이 항상,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할 내용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이 구원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존재 자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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