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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48)


7.2. 나의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나의 생각이 너무 심하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물론 바울의 뒷꿈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의 고백을 저도 감히 해봅니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6-24)

사도 바울의 탄식을 조금은 이해할 듯도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엄청난 선포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7:25-8:2) 

나는 언제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7장의 탄식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7장 25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도 바울은 7장의 탄식(적절한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습니다)에서 한참 머물렀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다가 사도 바울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나왔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마음로 섬기고 죄의 법을 육신으로 섬기는 것을 한 번 더 고 고백합니다. 그렇군요. 감사와 고백이 동시에 사도 바울의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그러므로(Therefore, 롬 8:1)”가 등장합니다. 저는 … 여전히 7장에 머물러 있는 저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8장으로 넘어가는 7장 25절이라는 디딤돌을 딛지 않은 채, 또는 딛지 못한 채 7장 24에서 머물러 있는 저를 봅니다. 언제 그 디딤돌, 즉 반석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8장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저도 그 디딤돌 위에 서고 싶습니다. 저를 그 반석 위에 세우소서. 

언제 정죄함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언제 해방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까요?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걸까요? 하나님, 저도 그리스도 안에 있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에 지쳤습니다. 

7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저도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희열을 맛보고 싶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는 희열을 맛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음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Jesus, 롬 8:1; through Christ Jesus, 롬 8:2)”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눅 17:13). 저를 로마서 8장으로 이끄소서. 주 품에 저를 품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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