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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8)


5.7.4. 감사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에 대한 것 역시 저의 사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누가복음의 이 기사를 읽고 생각한 저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눅 17:15-16)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글자그대로 하자면 하나님을 칭찬하는 것입니다(praising God). 하나님을 칭찬한다고 하는 것이 얼핏 보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칭찬이라는 것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잘 했어.”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학생의 답안지나 일기장에 “참 잘했어요.”라는 철수와 영희의 도장을 꽉 찍어주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격려해주는 것이 칭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칭찬하다니요? 여기에서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칭찬하는 것 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참 잘하셨습니다.” “선생님, 참 잘하셨습니다.” “사장님, 정말 잘하셨습니다.” 옛날을 배경으로 꾸민 사극의 흉내를 내면, “주군, 정말 잘 하셨습니다.” 이런 칭찬 말입니다. 그런 칭찬을 듣는 부모님, 선생님, 사장님, 그리고 주군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의 얼굴 표정이 어떨까요? 부모님은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할 겁니다. “내 아들이 나보고 잘했다는군. 자네들은 자식에게 그런 칭찬 들어봤어?”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옆 동료 선생님들에게 자랑을 늘어 놓으실 겁니다. “우리반의 아무개 있지 않습니까? 허허, 그 녀석이 기특하게도…” 하면서 계속 웃습니다. 사장님은 전체 회의에서 그 칭찬한 직원에게 특별한 상을 주실지도 모르지요. 물론 직원이 상을 받고자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입니다. 주군은 전쟁에서 승리의 자신감을 얻을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이걸 소위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비록 감사라는 낱말 자체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 말 자체가 감사입니다. 상상하시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표정을 상상하시겠습니까? 

김성일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많은 신앙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물론 주제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여러 작품 중에 일관되게 흐르는 또 하나의 주제는 고독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의 고독… 한 분이신 예수님의 고독…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지 못하는 고독… 그 외로운 분에게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칭찬하면 어떨까요? “오, 네가 나의 마음을 아는구나. 고맙다. 사실 나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단다. 외로운 나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나의 피조물, 사람이 필요했단다.”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칭찬이 나의 입술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 나병환자의 경우는 천벌이라고 여기던 나병이 나았으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항상 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을 칭찬하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과 원망과 분노에 찌들린 나의 마음에서 이 고백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나의 욕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니 이 나병환자처럼 큰 소리로(in a loud voice)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한 번 해 봅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일망정,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돌아오는 것(coming back)입니다. 당연히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전문적인 용어로 회개라고 합니까? 하여간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글자그대로 하면 예수님의 발 아래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throwing himself)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니까? 조금 전에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계속 가던 길을 가야 합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내 몸을 보아주십시오. 나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결예식을 치르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제사장님께서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병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나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대제사장이며 성전보다 더 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자기 몸을 땅바닥에 던지며, “예수 선생님,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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