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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26)


B. 주제가 바뀐 이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짓 선생들의 존재(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4.1.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드디어 편지의 목적이 나타납니다. 3절에서 유다가 편지의 내용까지 바꾸어서 쓰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은 ‘하느님(하나님)을 배반한 몇 사람이 몰래 여러분 가운데 끼여 들어왔다.’고 기록합니다. 새번역은 ‘몇몇 사람이 몰래 숨어들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여러 영역본들을 종합해보면 사악한 몇 사람이 불법 침입자처럼 눈에 띄지 않고 부지중에 기생충처럼 꿈틀거리며 미끄러져 기어 들어와 잠입하여 스며들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들어온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몰래 숨어 들어왔습니다. 세작(細作)이라는 낱말을 아십니까?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낱말입니다. 현대에는 간첩(間諜, spy)라는 낱말을 사용합니다.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이나 상황을 몰래 알아내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을 세작 또는 간첩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임무는 적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유다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거짓 교사들은 같은 성도인 것처럼 호의를 가장하여 비밀스럽게 활동합니다. 성경 곳곳에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5) 

이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생들, 즉 마귀는 흉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 진리를 나타내는지 또는 흉내내는지 정말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노략질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의해라(삼가라, beware of)’라고 말씀하시는 모양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행 20:29)

거짓 선생들은 양 떼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양 떼를 이용하고 희생시키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를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비뚤어진(어그러진, perverse) 말을 합니다. 그들의 말은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 2:4-5)

거짓 선생들은 가만히 들어와서 간첩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세작질해서 그들의 종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를 이겨낼 방법은 복음의 진리뿐입니다. 다음의 구절들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1-3)

Woodcut showing the Antichrist, 1498

계속해서 적나라하게 거짓 선생들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우리를 속입니다(미혹, deceit). 그래서 귀신의 가르침으로 주의를 돌립니다. 그들은 위선적인 거짓말쟁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이러쿵저러쿵 자기들 마음대로 금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 2:1)

그들의 결론은 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한 구절을 더 봅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일 2: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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