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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6)


Martin Luther initiated the Reformation with his Ninety-five Theses against the Catholic Church

간장종지만한 경건도 없는 제가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이, 그리고 정신 없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쓴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목을 <진리전쟁>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진리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라는 낱말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너무나 많아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6) 

그리고 싸움의 무기인 하나님의 전신갑주(the full armor of God)도 생각났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1-18)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memorial window Sir Lancelot wearing the whole Armour of God

여러분들이 이미 많이 들어본 구절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설교의 본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구절에 대해 어설픈 저의 생각을 썼지만, 결론마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한 것이 2017년이었습니다. 이 글을 2017년 후반기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은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의 5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종교개혁을 끌어온 것은 제 욕심일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냥 ‘개혁(Reformation; Protestant Reform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는군요. 루터(Martin Luther)와 선각자들 그리고 후배들의 개혁이 단순히 종교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온 유럽을 새 시대로 몰고 간 전방위적인 개혁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의 배경과 마틴 루터의  업적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Protestantism)를 한 번 되새기고자 할 뿐입니다. 가톨릭(Catholic Church)에 대항하는 이 신교도(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들은 그 낱말의 뜻 그대로 저항하는(protest) 무리였습니다. 이들의 신념은 ‘다섯개의 오직(Five Solas)’ 속에 오롯이 녹아져 있습니다. 

이 다섯 솔라(Five Solas)는 종교개혁 때 처음으로 대두된 기독교의 다섯 가지 표어로, 라틴어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한 개신교의 기본적인 믿음 체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하는군요. 따라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개신교는 대체로 이 개념을 따르고 있지요. 위키백과를 참고하여 이 다섯 솔라를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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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선생에 대한 유다의 마지막 은유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휘황찬란한 인공의 조명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나 또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캄캄한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말입니다. 막 쏟아지려고 하는 그 수많은 별들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유성(별똥별이라고 하죠?)이 지나가는 것도 사진에 담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지구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를 위해 수많은 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14-19) 큰 광명체는 태양일 것이고, 작은 광명체는 달이겠지요. 그리고 별들을 만드셔서 우주 전체의 별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1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다른 천체들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지구의 나이는 45~6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지구가 먼저 창조되고 해·달·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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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t van Rijn,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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