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39)


5.7.5. 이 나병환자가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손가락질 당하던, 한 마디로 아웃사이더였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감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는 않았던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말하는 ‘믿는 이’라는 신분이 감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야. 난 거듭난 사람이라고. 난 저기 저 사람들과는 달라. 난 천국에 갈 사람이야.”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런 생각을 가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은혜와 사랑을 입은 사람은 정작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나의 감사의 마음이 무뎌진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부어주신 은혜와 사랑이 엄청난데, 나는 그것을 모른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그만큼 내가 아둔하고 어리석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정작 감사를 표한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나 사역 중에 사마리아인을 비롯해 이방인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그리고 같은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벌레 취급당하던 사회의 약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라고 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학교에서 영어시험을 치루었습니다. 시험시간에 맞추어 그 학교의 시험장소로 갔습니다. 저는 약 20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에 어떤 중년의 여자분이 오셨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분은 신학생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다른 학과생들이 치루는 영어시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이 문이 열려 있지 않은 것을 보고 온갖 불평을 쏟아내었습니다. 왜 문을 일찍 열어 놓지 않느냐? 시험을 치르러면 최소한 30분 전에 미리 문을 열어 놓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학교가 이래서 되겠느냐? 등등… 저는 짜증으로 가득한 그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분도 30분 전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도착한 것이 20분 전이었고, 그분은 저보다도 10분 늦게 도착했지요. 하여간, 성경책을 옆에 끼고 그런 불평이 나오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물론 그분에게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그날 그분의 그 행동 하나만으로 그분을 평가한다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러나 저의 좁은 생각으로는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이 있고, 학교측에서 그것을 알고 있는 한 조금 늦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문을 열텐데 말입니다. 그분이 합격했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분이 합격하더라도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그분의 속사정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분의 행동은 의아했습니다. 

이처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소위 믿는 이들의 불평이 더 심할 때가 많음을 봅니다. 저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눈을 돌려 조금만 살펴보면, 소위 믿지 않는 분들이 더 감사를 표하고 만족함을 표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봅니다. 오늘 교회 행사가 있는데 비가 온다고 투덜대는 교인,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성과가 없으니 투덜대는 교인... 반면에 비가 오니까 미세먼지가 가라않겠다고 감사(?)하는 믿지 않는 사람, 준비에 비해 성과가 없지만 그 준비 자체에 의미를 더 두는 믿지 않는 사람. 한 번 생각해볼 만한 대목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81)

13.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선생에 대한 유다의 마지막 은유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휘황찬란한 인공의 조명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나 또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캄캄한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말입니다. 막 쏟아지려고 하는 그 수많은 별들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유성(별똥별이라고 하죠?)이 지나가는 것도 사진에 담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지구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를 위해 수많은 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14-19) 큰 광명체는 태양일 것이고, 작은 광명체는 달이겠지요. 그리고 별들을 만드셔서 우주 전체의 별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1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다른 천체들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지구의 나이는 45~6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지구가 먼저 창조되고 해·달·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t van Rijn, 16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