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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41)


2. 타락한 천사(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 (유 6)

6.1.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 

‘적재 적소(the right man in the right place)’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교회의 여러 표어 중 ‘정한 장소, 정한 시간’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전에는 몰랐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와 피치못할 사정으로 시간과 자리를 지키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소천하신 저의 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장사가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항상 정한 시간에 가게 문을 여셨습니다. 성경의 여러 본문 중에 에스더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에 2:21-23) 

Esther talking to Mordecai

저는 에스더서를 특별히 좋아힙니다. 주인공은 에스더(Esther)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조연인 모르드개(Mordecai)를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겉으로 드러난 주인공은 에스더와 모르드개이지만,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공이겠지요. 에스더서는 온통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작동하는 책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모르드개가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르드개가 대궐 문지기라는 권위를 부여받은 지위(position of authority)에 없었더라면, 왕의 내시 빅단(Bigthana)과 데레스(Teresh)가 계획한 쿠데타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그들의 음모를 알았기 때문에 왕은 암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제자리에 있지 않아야 할 사람, 하만(Haman)이 등장합니다. 하만이 누구입니까? 그는 유대인을 멸절시키려는 현대판 히틀러와 같은 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 성은 어지럽더라. (에 3:15) 

하만이라는 자는 왕과 함께 앉아서 마실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자리를 꿰차고 왕 옆에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왕과 함께 파티에 참석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수산 성(the city of Susa)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자리(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이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자리(지위)에 있어야 할 사람 대신에 엉뚱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대사나 현대사에서 이런 문제를 자주 접합니다.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백성이 고통받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에스더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에 8:15)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활약으로 하만은 처형당하고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물론 에스더서에는 하나님 여호와라는 낱말이 없지만,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가 있는 책입니다. 8장의 모르드개를 보십시오. 그는 철천지 원수 하만을 제거하고 유대인을 구원한 장본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 앞에서 나왔습니다(에 8:15).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본분인 대궐 문을 지키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왕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했습니다(에 8:15). 

The Triumph of Mordecai by Pieter Lastman, 1624.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지위를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것도 어떤 권위(authority)를 부여받은 지위를 지킨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물러날 때도 있겠습니다만, 자신이 맡은 본분을 충성스럽게 이행할 때, 주위 사람들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합니다(에 8:15). 올바른 사람(the right man)이 올바른 자리에(in the right place) 있어야 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물건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두지 못해 다음에 한참 찾고 우왕좌왕한 경험이 한두번씩 있을 겁니다. 물건도 그럴진대,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어쨌거나, 유다는 6절에서 지위(positions of authority)를 지키지 않고 처소(proper dwelling)를 떠난 천사를 언급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벧후 2:4, 9) 

유다서와 베드로후서 2장은 비슷한 점이 많군요.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난 것을 범죄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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