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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22)


3.4. 구원과 믿음이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도 빠지지 않고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하고, 축구경기장에도 “John 3:16”이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합니다. 자동차 범퍼용 스티커로는 이미 수도 없이 팔렸습니다. 새로운 전화번호를 5316(요 3:16)이라고 일부러 정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암송해볼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지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암송할 겁니다. 저는 평소에 이 구절을 읽거나 생각할 때마다 ‘이처럼’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앞의 구절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4-15) 

갑자기 웬 모세(Moses)? 갑자기 웬 뱀?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3,500년 전의 민수기(Numbers)로 잠깐 가볼까요? 어차피 한번쯤은 생각해보고 넘어가야 할 것이니까요. 

Moses lifts up the brass serpent, curing the Israelites from poisonous snake bites in a painting by Benjamin West

백성이 호르산에서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들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 21:4-9)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에게 대드는 장면입니다. 우리 생활의 장면입니다. 나의 생활의 장면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장면입니다. 불뱀(fiery serpents)이 어떤 뱀인지 모르겠지만, NIV에 따르면 독이 있는 뱀(venomous snakes)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독이 있는’이라는 뜻의 낱말 venomous에 또 다른 뜻이 있는데, ‘원한에 찬’이라는 뜻이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고, 즉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하나님께서 원망의 뱀을 보내셨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범죄의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감사하지 않고 또는 못하고, 원망한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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