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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4)


5.7. 원망과 불평의 반대는 감사일 것입니다. 라이프성경사전의 감사(感謝, thanks)에 대한 설명을 볼까요? 먼저 ‘감사’라는 용어의 원어를 살펴봅니다. 

‘하나님께 자복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으로 ‘야다’라는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시 32:5)

예배를 드릴 때 부르는 감사찬양을 ‘토다’라고 한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7)

대개 사람 사이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감사한 마음’과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인 ‘유카리스티아’라는 낱말도 있군요.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바울을 고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 (행 24:3)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 낱말이 있다고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엡 5:3-4) 특히 여기서는 진심을 담은 감사의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는 ‘카리스’라는 낱말도 있습니다. 생각컨대 위에서 본 ‘유카리스티아’는 이 ‘카리스’와 ‘좋은’이라는 뜻의 ‘유’가 합쳐져 만들어진 낱말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 6:17-18) 그렇습니다. 죄의 종(slaves to sin)에서 의의 종(slaves to righteousness)으로 신분이 바뀐 것은 분명히 그리고 당연히 ‘카리스’할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고전 15:57) 우리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카리스’합니다. 그런데 승리를 주시는데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이 전제조건을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지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주십니다. 

이제 라이프성경사전의 설명을 봅니다. 고마움에 대한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나 행위를 감사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일상 생활 가운데서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시 106:1; 107:1; 118:1, 29; 136:1; 대상 16:4, 34, 41; 대하 7:3; 스 3:11; 렘 33:11). 그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그 대표적 사례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감사는 이스라엘의 전 역사의 중심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을 한치 오차 없이 이행해주셨습니다(시 57:9; 100:4; 107:8; 118:19; 138:2). 따라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지키시며 사랑을 베푸시는 데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이 곧 감사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과 맺은 자신들의 계약을 성실하게 이행하겠다는 다짐이요,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감사하는 마음에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는 올바르고 자발적인 자세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약에서의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감사라는 점에서 구약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감사 기도를 통해 감사하는 자세와 감사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마 11:25; 15:36; 26:27; 막 8:6; 14:23; 눅 10:21; 22:17; 요 6:11, 23; 11:41; 고전 11:24). 또한 믿음 생활에서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여러 비유와 사례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7:16, 18). 그래서 심지어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고 경고하였습니다(롬 1:21).

이렇게 본다면 구원받은 성도의 제 일의 삶은 곧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입니다.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고 권면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기자들은 그들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고했습니다(엡 5:4; 골 3:15). 왜 이토록 감사 생활이 중요합니까? 왜냐하면 오직 감사가 나타나는 데에서만 참 신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롬 1:21). 말하자면 감사는 신앙을 향한 부름(call to faith)의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혜에 대한 유일한 신앙적 응답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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