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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30)


5.3. 유다의 편지를 계속 읽읍시다.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 역시 바울 선생님의 해석을 볼까요?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23,000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전 10:5-11)

어떤 말로 설명하더라도 바울 선생님의 설명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은 웬만큼 교회에 다니신 분들은 다 알 겁니다. 그리고 뱀에게 멸망한 이야기도 압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가는 것 같지만, 음행하다가 23,000명이 죽은 것과 원망하다가 멸망한 사건을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고전 10:11),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유 7). 

Moab leads Israel into sin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 가운데에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었더라. (민 25:1-9)

23,000명이든 24,000명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Moab)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 후 세월이 지나 사사시대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긴 전 모압 여인인 룻(Ruth)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여인인 룻을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룻 4:18-22; 마 1:1-17)에 넣어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민수기의 이 사건은 아름다운 룻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했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현대의 관점으로 이방 여인, 즉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출애굽할 당시에 많은 이방 무리도 함께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하니까 말입니다(출 12:38).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음행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 번 양보해서 한 때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음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음행을 정당화하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민 25:2-3a) 

아, 드디어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민 25: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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