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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유다서(121)

유다서를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유다서가 짧기 때문입니다. 긴 서신서나 예언서 등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소에 설교에서 들어보지 못했고, 목사님들이 인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설교본문이나 인용구절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목사님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제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St Bernard in "A Short History of Monks and Monasteries" by Alfred Wesley Wishart (1900)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혹자는 지식을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한다. 혹자는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허영이라고 한다. 혹자는 섬기기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아는 만큼 생각한다고 합니까? 아니면 생각하는 만큼 안다고 합니까? 제가 아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일천(日淺)합니다. 이런저런 각주와 관주, 그리고 라이프성경사전을 인용한 것을 보면 아실 겁니다. 그러니 지식을 추구합니다. 호기심, 또는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궁금증(호기심)이 경건을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저는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저의 경건하지 않음을 충분히 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난잡한 글을 쓰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서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단지 허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평신도인 제가 이런 글을 쓴다는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가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아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모

유다서(120)

"Luther at Erfurt", which depicts Martin Luther discovering the doctrine of sola fide. Painting by Joseph Noel Paton, 1861. 4. 오직 믿음(Sola Fide):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원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루터란과 개혁파 교회를 로마 카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를 구별하는 기독교 교리입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교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것은 인간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타락한 죄인으로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 부터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죽음, 부활에 의해서만, 즉 오직 예수에 의해서만 법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 것입니다. 이런 법정적 의를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b; 롬 1:17b)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 3:11)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히 10:38a)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성직자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혼동되던 기존의 교회에 반하여 모든 영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로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S. D. G." (for Soli Deo Gloria) at the end of a G. F. Handel manuscript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유다서(119)

3. 오직 은혜(Sola Gratia):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은혜(헨, hen)’는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는 자비, 은혜, 사랑을 말합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8)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2). Hebrew letters spelling Chesed 또 ‘은혜(헤세드, chesed)’의 기본 의미는 ‘바라다,’ ‘사랑하다’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총이나 자비, 사랑, 긍휼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삼하 2:6)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유다서(118)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자연인의 상태에 대한 입장은,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참된 생명력을 잃은("죽은") 절대적인 절망의 상태로서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으며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만 사후의 심판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라는 것이 Solus Christus의 내용입니다. 근거가 되는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0-12)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 2:16-17) Appearance of Jesus Christ to Maria Magdalena (1835) by Alexander Andreyevich Ivanov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

유다서(117)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성경은 유일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으로,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문체가 명료하며 자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거룩한 전승은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전승도 인정하며, 교회가 권위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기성 교회의 전통(Prima Scriptura)과는 반대됩니다. 그렇다고 Sola Scriptura가 기독교의 오랜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기독교의 모든 전통은 오직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어야 하며,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전통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I saw another angel fly in the midst of heaven, having the everlasting gospel to preach..." This illustration is from the title page of Luther's Bible. 기독교 성경은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며 무오한 규칙이라고 믿는 기독교 신학 교리입니다. 이것은 종교회의나 어떤 교회의 규칙보다도 오직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이 말씀이며, 모든 것들에 앞서서 주장되어야 하며, 다른 신학적 주장은 오직 성경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은 종교 개혁가들이 신학적 기둥으로 간주하는 다섯 솔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교 개혁의 핵심원리로서 성경의 해석과 적용은 성경이외의 어떤것과도 동일한 권위를 가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이 없는 교황보다 성경으로 무장된 평범한 성도들이 더 강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의 본문의 권위에 강조를 두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 전통을 성경에 함께 권위의 근거를 두었지요. (기억하십니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 말입니다.) 오직 성경이 의미하는 것은 교회의 전통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거

유다서(116)

Martin Luther initiated the Reformation with his Ninety-five Theses against the Catholic Church 간장종지만한 경건도 없는 제가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이, 그리고 정신 없이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쓴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목을 <진리전쟁>이라고 붙여보았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거짓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진리밖에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라는 낱말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너무나 많아서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6)  그리고 싸움의 무기인 하나님의 전신갑주(the full armor of God)도 생각났습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1-18)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memorial window Sir Lancelot wearing the whole Armour of God 여러분들이 이미 많이 들어본 구절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설교의 본문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구절에 대해

유다서(115)

마쳤습니다. 총정리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도 자문해 보십시오. 거짓 선생들은  1) 경건하지 않습니다(유 4).  2)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꿉니다(유 4).  3)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유 4).  거짓 선생들은  1)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유 5).  2)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입니다(유 6).  3)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유 7).  거짓 선생들은  1) 가인의 길에 행하였습니다(유 11).  2)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습니다(유 11).  3)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습니다(유 11). 거짓 선생들은  1) 애찬에 암초입니다(유 12).  2)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유 12). 3)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유 12). 4)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입니다(유 12).  5)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유 13). 6)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유 13). 거짓 선생들은  1)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들입니다(유 16). 2)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유 16). 3)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입니다(유 16) 거짓 선생들은  1)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유 19). 2)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유 19). 3)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유 19). 그러나 우리는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합니다(유 17). 2)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웁니다(유 20). 3) 성령으로 기도합니다(유 20). 4)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지킵니다

유다서(114)

25.2.2. 위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위와 존엄,’ ‘탁월한 명성,’ ‘초월적인 주권’ 등을 뜻합니다(출 23:27; 에 1:4; 사 33:21; 행 9:27; 유 1:25). 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되며, 주로 ‘영광,’ ‘존귀’와 함께 표현됩니다(신 5:24; 대상 16:27). 개역개정판에서는 ‘지극히 크신 이’(히 1:3; 8:1)로도 번역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왕을 부를 때 ‘폐하(Your Majesty)’라고 부릅니다. majesty는 라틴어 maiestas에서 왔는데. ‘당당함, 큼, 대단함(greatness)’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위엄이 있는 분은 홀로이신 하나님이십니다.  25.2.3. 권력(power)은 남을 복종케 하는 힘으로, 왕의 권력(왕하 13:8), 군사력(삿 8:21), 재물이나 보화(스 4:23) 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 권력의 유한함을 지적하면서(렘 17:5) 참된 권력은 오직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벧전 5:11). ESV에서 번역한 dominion(통치(統治))을 찾아보았습니다.  통치는 지배자가 주권을 행사하여 국토와 국민을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최고의 통치자이며(출 15:18; 시 103:19), 이 모든 세상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삿 5:11; 대상 16:31; 시 93:1; 145:13). 그리고 이 세상을 의와 공평으로 영원히 다스릴 메시야의 통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사 32:1; 슥 6:12-13; 마 2:6; 계 11:15). 세상 모든 통치자는 최고의 권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은 존재로서(롬 13:1), 정의를 행하고 선을 장려하며 악을 징벌하여 백성이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통치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벧전 2:13). 따라서 성경은 통치자에게 순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딤전 2:1-3).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

유다서(113)

25.1.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  우리 구주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과연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 글에서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무당을 섬기듯 섬기지 않습니까? 그저 나의 안위와 소위 말하는 복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혼합종교를 만든 것처럼 나도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기독교와 합쳐서 음란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상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명예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까? 정말 풀리지 않는 저의 고민입니다.  그 홀로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영광(榮光, glory)과 위엄(威嚴, majesty)과 권력(權力, power[NIV]; dominion[ESV])과 권세(權勢, authority)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습니다. 많이 들어보신 낱말들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이 낱말들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역시 라이프성경사전의 도움을 받습니다.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5.2.1. 영광은 빛나는 영예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한 빛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긍휼, 완전성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행위 등을 나타내며, 사람이나 사물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움,’ ‘뛰어남,’ ‘명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카보드’를 들 수 있습니다. ‘카보드’의 기본 의미는 ‘무거움’으로서, 어떤 중요함이나 가치를 나타내며, 이것이 ‘영광’(존귀, 광휘)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그분의 위엄이 넘치는 현현(임재)에 대한 표현으로서, 또는 초월한 광휘(위엄, 권위, 장엄)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존함을 뜻하는 말로 묘사되었습니다(출 16:7

유다서(112)

Ⅴ. 찬가(24-25) 마지막으로 유다는 찬가를 올립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 24-25) 24.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히(able)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하나님께서는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십니다. 물론 이 본문은 연보에 관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돈에 국한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 목적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는 것이지요. 미가서를 기억하십니까?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하나님의 능하신 은혜가 넘칩니다. 그 은혜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마 6:33). 여기서 말하는 ‘먼저(first)’는 두번째(second) 또는 세번째(third)가 있는 먼저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히려 ‘오로지, 오직(only)’의 뜻입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동기로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동기에 나의 이익을 생각하거나 계산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무당에게 복채를 주면서 복을 비는 것이 가증스럽다는

유다서(111)

23.2. 그 다음 구절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그래서 공동번역을 찾아보았습니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사악한 자들은 너무나 부패한 존재로 그려져서 심지어 그들의 옷마저도 오염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사탄의 영향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큽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면 영적으로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악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느끼겠지요. 제 주위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는데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기도가 잘 안된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데 섬뜩함을 느끼는 분도 있었습니다. 맛있게 음식을 먹었는데 몸이 이상해서 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제사상에 올라왔던 음식이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영적인 능력이 그것을 느끼게 하는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게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어쨌거나, 그 죄는 미워하되, 두려움으로(mixed with fear, 조심스럽게) 긍휼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 옷이나 그 사람에게 오염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The Sardis Synagogue ‘옷(garment[KJV, NASB], clothing[NIV])’이라는 낱말 옆에 계시록으로 가보라는 관주가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유다서(110)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 22-23) 22.1. 유다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합니다. 첫째는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고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짓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니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겠지요. 저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고 부족한 탓도 있습니다만, 뭔가를 조곤조곤 설명해 주고 설득시켜 주면 그나마 수긍하는 편입니다. 물론 나의 마음이 완악하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알아듣게 설명해 주고 가르쳐주면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물론 우격다짐이 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예전에 가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의심이 생기면, 덮어놓고 믿어라.’ 글쎄요... 반농담이지만, 성경책을 덮어놓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어라고 그렇게 외쳐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대, 의심하지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면 얼마나 믿을까요? 믿음이 약해서 답답한 경우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이런 어설픈 글이라도 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또 참으시고, 또 인내하시고, 또 긍휼히 여기십니다. 바로 앞절에서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Sodom and Gomorrah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by Hartmann Schedel, 1493. Lot’s wife, already transformed into a salt pillar, is in the center. 23.1. 또 어

유다서(109)

21.1. 이렇게 자신을 세우며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in God’s love)” 자신을 지키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삶을 살아냄으로써(빌 2:12) 순종하고 신실할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3절과 20절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뿐입니다. 진리뿐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지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서로 맞물려 돌고 돕니다.  21.2. 여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자비)이 있습니다. 그 긍휼이 성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사실 말이 기다림이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버스를 한 시간 이상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하루나 이틀 동안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오래 기다려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얼마나 기다렸을까요(눅 15:11-32)?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유다서(10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 20-21) 20.1. 유다는 몇가지 권면을 합니다. 먼저,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다. “너희는 … 자신을 세우며…” 어디에서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까? 자신의 믿음 위에서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어떤 믿음입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다서 3절의 “단번에 주신 믿음”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면 됩니다. 그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닙니다. NIV에는 이 말씀마저도 수동태(rooted and built up)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원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뿌리내리게 하시고 세워주십니다. 아멘!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 선생님은 이것도 수동태(strengthened)로 썼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위대한 수동입니다. 아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믿음을 뿌리내리게 하시고, 세워주시고, 굳건히 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하는 것 뿐입니다.  Praying Hands by Albrecht Dürer 20.2.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

유다서(107)

19.3. … 성령이 없는 자니라. 거짓 선생들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4-15) 흑백논리(黑白論理)라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흑백논리는 모든 것을 흑 아니면 백, 선 아니면 악, 득 아니면 실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논리학적 오류 중에 하나라고 하는군요. 두 가지 극단 이외의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립, 중용,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용납하지 않으며 반드시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는 논리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가 흑백논리라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의인과 악인, 용서와 미움, 성령과 육, 하늘과 땅, 넓은 문과 좁은 문, 등등…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지만, 삶과 죽음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라는 문제에서 보면 흑백논리가 성립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야(Elijah)가 대성일갈(大聲一喝)하는 모양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Joshua and the Israelite people, Karolingischer Buchmaler, c. 840 유대인들의 영웅인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Joshua)도 일갈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유다서(106)

19.2. … 육에 속한 자며 ... 조금 전의 갈라디아서 목록(갈 5:19-21)에 있는 것처럼 거짓 선생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시기와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단순한 본능(mere natural instincts)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3:14-16) 육에 속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쓰디쓴 시기심(독한 시기, bitter envy)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야망(다툼, selfish ambition)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설령 이런 것들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할텐데, 이들은 그런 마음을 자랑합니다. 이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합니다. 진리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거짓 지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의 것이며, 영적이지 않으며(정욕의 것, unspiritual), 귀신의 것입니다. 이런 시기와 야망이 있는 곳에는 무질서(혼란, disorder)와 모든 악한 일(every vile practice)이 있을 뿐입니다. 하늘의 것은 진리이며, 땅의 것은 거짓입니다. 위에서도 인용했지만, 야고보 사도의 다음 구절을 다시 적어 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도는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분명히 나누고 있습니다. 성결(pure), 화평(peaceable), 관용(gentle), 양순(open t

유다서(105)

19.1.2. 그런데 옛날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전 1:10-13)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겁니다. 교회의 분열… “나는 우리 목사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 장로님은 우리편이야.” 등등…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급기야 아무개파, 아무개파 등으로 나뉘어 싸웁니다. 믿음의 도(유 3)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야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파에 속해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하려고 합니다. 이런 곳에는 혼란(disorder)과 모든 악한 일(every vile practice)만 보입니다(약 3: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으로 서로 싸우는데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나겠습니까?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도 이 분열이 가장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해 씁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상상해 봅니다. 적이 바로 코 앞에 있습니다. 참호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언제 적이 총을 쏘며 달려들지 모릅니다. 적의 뒷편에서는 포병부대가 우리를 조준하고 있습니다. 적의 왼쪽에는 탱크부대가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의 오른쪽에는 지원병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을 제대로 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런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아군은 정신을 차리지

유다서(104)

19.1.1.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  거짓 선생들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분열을 일삼고 부추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4-6)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y, between 1408 and 1425 위의 구절에서 ‘하나(한, 통일 포함)’이라는 낱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이미 2,000여 년 전에 고린도에서는 분열이 있었습니다(고전 1:11-12; 3:4).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시기(jealousy)와 분쟁(quarreling)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에 속해서 시기합니까? 분쟁을 일삼습니까? 저는 우리나라 기독교(개신교)의 교파를 모릅니다. 알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라이프성경사전에 의하면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샘하여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부모의 편애, 사회적으로는 경쟁 의식이나 차별, 개인적으로는 실력이나 배경, 외모 등 열등 의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나(창 4:5-6, 8), 사라가 잉태한 하갈을 학대한 것(창 16:5-6), 남편 야곱을 차지하기 위한 라헬과 레아의 경쟁(창 30:1),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판 사건(창 37:19-20),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삼상 18:8-9, 29

유다서(103)

18.5.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 전에 비가 내렸을까요?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창 2:4-5).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지요(창 2:6). 그리고 홍수 심판의 창세기 6장까지 ‘비’라는 낱말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노아를 비롯한 그 당시 사람들은 비라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게는 중요하다기보다는 궁금증이 더 큽니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The Deluge, by John Martin, 1834. Oil on canvas. Yale University “이보게, 노아, 도대체 뭘 하는거야? 하루이틀도 아니고, 벌써 몇 년째 뭘 만드는거야?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자네가 뭘 만드는지 아직도 모르겠군. ” “어이, 왔는가? 여호와께서 이 땅의 패역함을 보시고 심판하시겠다는군. 비를 내려서 홍수로 이 땅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셨어.” “뭐? 패역? 심판? 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래 좋아. 우리가 좀 나쁘게 행동한 것은 인정하네. 아니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나? 그리고 자네 식솔들에겐 해를 끼치지 않았어. 그런데 무슨 심판? 그리고 뭐? 비? 그게 뭐야? 처음 듣는 말이군. 자네는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나?” “나도 잘 몰라. 여호와께서 홍수를 땅에 일으켜 땅에 있는 것들을 다 죽이겠다고 하셨을 뿐이야. 이 땅위의 저 하늘을 보게. 궁창의 물이 보이지? 그 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비가 아닐까 짐작하기만 할 뿐,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르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명령대로 이렇게 배를 만들고 있을 뿐이야. 이보게, 자네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포악한 행동을 그만 하게.” “에이, 이 사람아. 저 위의 물이 쏟아진다고? 그렇다 하더라도 얼마나 되겠어? 저기 높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하기 위

유다서(101)

18.3.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모욕과 희롱은 계속됩니다. Crucifixion, from the Buhl Altarpiece, a particularly large Gothic oil on panel painting from the 1490s.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5-44)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홍포를 입힙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가시관을 씌웁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갈대를 쥐게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인사를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그 왕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며(마 27:42-43) 희롱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선심쓰는 척하며 이웃에게 조롱의 옷과 가시관과 갈대을 주지는 않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롱의 인사, 글자그대로 가시가 돋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평소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는 못할 망정, 어설픈 나의 잣대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서러움을 공감하지는

유다서(100)

18.2. 이 마지막 때에 경건하지 않은 욕망을 따르며 조롱하는 자들(mockers[KJV, NASB], scoffers[NIV, ESV])이 있을 것입니다. ‘조롱(嘲弄)하다’는 ‘비웃거나 깔보면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은 ‘기롱(譏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롱하다’는 ‘실없는 말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조롱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많은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옮깁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상상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비웃고 깔보면서 놀리면, 아버지를 실업는 말로 놀리면, 그렇게 조롱하는 자식의 눈이 까마귀에게 쪼인답니다. 독수리가 와서 그 시체의 살점을 새끼에게 먹이로 준답니다. 거의 공포영화 수준입니다.  ,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 17:5)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 14:31)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비웃음까지 당합니다. 버스비가 없어서 부르튼 발을 끌며 걸어가는데, 깔보는 시선까지 느껴집니다. 자식을 학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놀림을 받습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Édouard Manet, Jesus Mocked by the Soldiers, c. 1865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

유다서(99)

18.1. 유다는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정리합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먼저 라이프성경사전이 말하는 마지막 때(종말)를 봅니다. 시간이나 사건의 끝(마지막)을 뜻하는 말로써,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끝(민 23:10; 시 39:4), 우주적으로는 세사이 끝나는 시간(신 32:29), 그리고 구속 역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말합니다(마 24-25장). ‘끝날(미 4:1),’ ‘말일(사 2:2),’ ‘후일’단 2:28),’ ‘말세(행 2:27; 벧전 1:20),’ ‘여호와의 날(암 5:18),’ ‘주의 날(행 2:20; 살전 5:2),’ ‘주 예수의 날(고후 1:14),’ ‘그리스도의 날(빌 1:10),’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하나님의 날(벧후 3:12),’ ‘그날(호 2:16, 18, 21; 딤후 1:18),’ ‘그 때(사 35:5-6),’ ‘그 후(욜 2:28),’ ‘이 모든 날 마지막(히 1:2)’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구약 시대의 종말관은 이중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군요. 즉, 지상에서의 당면한 재난이 종결되는 때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종 메시야로 인해 이뤄질 평화로운 세계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사 7:10-25; 렘 23:5-6). 그리고 여호와의 날로 일컬어지는 종말은 한편으로 심판과 징계의 측면이 있으나(사 11:11-16; 욜 3:16-21),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측면도 담겨 있습니다(사 29:6; 35:4). 종말의 징조로는 전쟁(사 19:2; 대하 15:6), 기근(렘 15:2; 겔 5:16-17), 지진(시 18:7; 사 24:19),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사 11:1-2; 61:1-2; 욜 2:28-32) 등이 있을 것인데, 이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집니다(사 24:1). 신약 시대의 종말관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구약의

유다서(98)

Ⅳ. 성도들에 대한 권면(17-2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여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유 17-19) 17.1.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말을 인용하며 권면합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foretold)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미리 한 말 몇가지를 찾아볼까요? Paul the Apostle, by Rembrandt Harmensz van Rijn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28-3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딤전 4:1-2)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

유다서(97)

16.5. …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거짓 선생들은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아첨(阿諂, flatter)하다’는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린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유리한 점(advantage)을 차지하기 위해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조금의 이익이라도 생길 기미가 보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듭니다. 특히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 달라 붙습니다. 온갖 감언이설과 뇌물로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씁니다.  또는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도 아첨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힘이 없는 낮은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자기는 이익을 챙겼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요. 이들은 공정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아첨은 공존의 길이 아니라 공멸의 길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 (레 19:1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7-19)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십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고 나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결정합니까? 그렇게 결정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나도 나그네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리고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뇌물을 쓰지는 않습니까?  ‘상도(商道)’라는 드라마를 아십니까? 제법 오래전에 MBC에서 제작한 드라마입니다. 원래 소설이었는데 드라마로 만든 것이니다. 최인호 선생님의 작품이지요. 소설과 드라마가 꽤 다릅니다.

유다서(96)

16.4.1.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 거짓 선생들은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조금 전에 본 그 혀로,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남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수치의 거품일 뿐인 자랑을 늘어놓기에 바쁩니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벧후 2:18)  이제 겨우 올바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것도 음란으로써 유혹합니다. 몇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음란, 육체의 정욕 등이 성적인 말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못하고 무당을 섬기듯 섬기는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며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해서 의무적으로 섬기는 것 말입니다. 그것도 섬기는 체 하는 것 말입니다.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 이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구나. 더 지성을 드려야지.’ 얼핏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나의 온 존재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동기가 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진대, 여전히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엄청나고 가증스러운 음란을 매일 저지르는 비참함에 빠져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지 싶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합니까? 하나님을 섬깁니까? 아니, 섬기려는 흉내라도 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합니까? 내 마음의 순수한 동기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누구를 바라볼까요?  16.4.2. 남이 잘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 못하는 것을 대

유다서(95)

16.3. …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 거짓 선생들은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사악한 욕망(their own evil desires)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라이프성경사전은 정욕(情慾, lusts[KJV]; evil desires[NIV])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쾌락(快樂, pleasure)을 추구하는 무절제하고 감각적인 욕망(롬 1:24), 이성에 대한 강렬한 성적 욕망(약 4:1), 혹은 포괄적 의미에서 ‘세상적이고 헛된 소망(갈망),’ ‘끊임없는 욕구(desire)’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간음과 성적 타락의 상황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은 결국 부패와 죄악을 초래하지요(벧후 1:4; 2:10). 개역개정판에는 ‘욕망’(잠 21:25)으로도 번역했습니다.  특히 육체의 더러운 욕망에 빠져 사는 자들과 하느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당돌하고 거만해서 영광스러운 천사들에게 거침없이 욕설을 퍼붓습니다. (벧후 2:10, 공동번역) 찬송가 268장 2절 가사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이길 힘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정결한 마음을 얻게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이러한 사악한 욕망, 정욕을 이길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그 보혈을 믿는 믿음의 도를 굳게 지키고, 그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는(유 3) 것입니다. 

유다서(94)

16.2.4. 성경에는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키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먼저 사도 베드로는 하나의 마음(unity of mind)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분열하지 않고 통일된 하나의 마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다양한 심리, 사고, 행동을 무시하고 일정한 틀에 넣어 인위적으로 규격화하고 동질화하는 경향인 획일(劃一, uniformity, standardization)을 이루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성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나누어지지 않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나는 어떤가요? ‘일치’라는 명분으로 형제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지는 않습니까? 나의 생각이나 방침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까? 다양성 속의 일치. 서로 이루어내어야 할 미덕입니다. 그리고 동정(同情, sympathy)을 가지라고 합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자세를 가지라고 합니다. ‘sympathy’는 ‘함께(together)’라는 그리스어 syn과 ‘감정, 느낌, 마음(feeling)’이라는 뜻의 pathos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형제의 감정과 느낌과 마음을 함께 하라는 말이지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저는 타인을 ‘소 닭보듯이’ 하는 경향이 강해서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니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형제의 사랑(brotherly lo

유다서(93)

16.2.3. 거짓 선생들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들추어 내어 마음의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비록 거짓 선생들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기어이 들추어내어 서슬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지는 않습니까? 비록 그것이 성경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물론 권면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약점까지 들추어낼 필요까지 있을까요? 예쁘게 바른 벽지를 일부러 뜯어내어 못자국을 꼭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약점때문에 어지할 바를 몰라 자신을 한스럽게 여기는 이웃에게 말입니다.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말을 서슴치않고 내뱉았을 겁니다. 하나님이여, 용서하소서. 나의 입술을 다스리소서. 믿음의 도(유 3)를 지키게 도우소서. 거짓 선생들처럼 허탄한 말을 하지 않도록 나의 마음을 다스리소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 17:9)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12)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약 5:19-20) 내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아닙니까? 내가 그 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아닌지요? 나는 남의 허물을 얼마나 덮어줍니까? 나에게 그 허물을 덮어줄 만한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읍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제 3자의 허물을 속살거리며 말하더라도, 나도 거듭 말하거나 여기저기 옮기지 맙시다

유다서(92)

16.2.2.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빈민가에서 자란 흑인 소년 마이클 오어(Michael Oher, 일명 빅 마이크(Big Mike), 퀸턴 애런(Quinton Aaron)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를 리 앤 투오이(Leigh Anne Tuohy, 샌드라 불록(Sandra Bullock)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라는 백인 상류층 부인이 입양해서 양육하며 보살피는 영화입니다.  리 앤이 마이클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서 친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이클의 어머니인 데니스 오어(Denise Oher, 애드리안 레녹스(Adriane Lenox)가 배역을 맡았습니다)는 빈민가에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가여운 흑인 여성입니다. 마이클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안을 팽개치고 나갔습니다. 리 앤이 이 데니스에게 찾아와 마이클을 입양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지저분한 데니스의 집에서 리 앤은 가급적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데니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리 앤의 진정성을 알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자 리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니스 곁으로 와 앉습니다. 지저분한 소파는 리 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술과 마약에 찌든 데니스가 가여울 뿐입니다. 그리고 리 앤은 아무 말없이 데니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여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리 앤이든 데니스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젠가는 나도 리 앤이 될 수 있고, 또 언젠가는 내가 데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손 한 번 잡아주는 것, 어깨 한 번 다독여 주는 것,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없이, 그 구멍난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것 말입니다. 예, 상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그 상상을 하며 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