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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7)


19.3. … 성령이 없는 자니라.

거짓 선생들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4-15)

흑백논리(黑白論理)라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흑백논리는 모든 것을 흑 아니면 백, 선 아니면 악, 득 아니면 실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려는 논리학적 오류 중에 하나라고 하는군요. 두 가지 극단 이외의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립, 중용,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용납하지 않으며 반드시 어느 한 쪽의 입장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는 논리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리 기독교가 흑백논리라고 봅니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의인과 악인, 용서와 미움, 성령과 육, 하늘과 땅, 넓은 문과 좁은 문, 등등…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지만, 삶과 죽음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라는 문제에서 보면 흑백논리가 성립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야(Elijah)가 대성일갈(大聲一喝)하는 모양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왕상 18:21)

Joshua and the Israelite people, Karolingischer Buchmaler, c. 840

유대인들의 영웅인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Joshua)도 일갈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4-15)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6:13)

그렇습니다. 성령과 육은 서로 반대입니다. 마치 진리와 거짓이 정반대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잘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 먼저 육체의 일을 보시지요.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 (갈 5:19-21)

그리고 연이어 모든 믿는 이들이 추구하는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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