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2.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빈민가에서 자란 흑인 소년 마이클 오어(Michael Oher, 일명 빅 마이크(Big Mike), 퀸턴 애런(Quinton Aaron)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를 리 앤 투오이(Leigh Anne Tuohy, 샌드라 불록(Sandra Bullock)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라는 백인 상류층 부인이 입양해서 양육하며 보살피는 영화입니다.
리 앤이 마이클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서 친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이클의 어머니인 데니스 오어(Denise Oher, 애드리안 레녹스(Adriane Lenox)가 배역을 맡았습니다)는 빈민가에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가여운 흑인 여성입니다. 마이클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안을 팽개치고 나갔습니다. 리 앤이 이 데니스에게 찾아와 마이클을 입양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지저분한 데니스의 집에서 리 앤은 가급적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데니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리 앤의 진정성을 알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자 리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니스 곁으로 와 앉습니다. 지저분한 소파는 리 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술과 마약에 찌든 데니스가 가여울 뿐입니다. 그리고 리 앤은 아무 말없이 데니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여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리 앤이든 데니스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젠가는 나도 리 앤이 될 수 있고, 또 언젠가는 내가 데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손 한 번 잡아주는 것, 어깨 한 번 다독여 주는 것,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없이, 그 구멍난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것 말입니다. 예, 상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그 상상을 하며 이 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흐느끼는 것 밖에는… 자, 진정하고... 나중에 빅 마이클은 미국프로풋볼팀의 하나인 볼티모어 레이븐즈(Baltimore Ravens)에 입단합니다.
“너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거야.”
“평소에 새벽기도하지 않으니 이 재앙이 너에게 닥친거야.”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거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노하셨어.”
“네 마음이 완악하니 이런 일이 온게지.”
“전도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어?”
“그렇게 봉사하자고 불렀건만,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났구만.”
“남편(또는 아내, 또는 자녀)이 교회에 안다니니까 그렇지.”
“그것도 기도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은 그런 기도 듣지도 않으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당신 남편(또는 아내, 애들)이 잘 될 것 같아?” 등등…
또는 제 3자에게 흘리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 있잖아? 이번에 부도가 났다는구만. 주일성수하지 않으니 그런 일을 당한게지.”
“소식 들었어? 아무개가 교통사고 당했다고 하네. 전도 안할 때 알아봤어.”
“세상에! 공부 잘하던 아무개 집사 아들말이야. 이번에 대학에 떨어졌다나봐. 내가 그 집사를 좀 아는데 말이야. 십일조 낸 적이 별로 없어.”
“그 집사 말이야, 요즘 얼굴이 어둡던데… 우리가 모르는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 아니야?” 등등… 이런 말을 얼마나 쉽게 내뱉습니까? 또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또는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을 콕 찍어서 말하지는 않지만 에둘러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쎄요… 에둘러 말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까요? 차라리 대놓고 “너의 잘못은 이것이야.”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에둘러 말하는 것은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하고, 더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더 수치심을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창이 상대방을 찌르고 또 찌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나름대로 의를 피력하면서 말입니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십중팔구 “너는 얼마나 잘났냐?”입니다. 자연스러운 자기방어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핑퐁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됩니다.
쉽게 내뱉는 말들을 위에서 몇가지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 말을 활자로 이렇게 옮겨쓰는 자체가… 제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은근히 나의 의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어차피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지 못하는 것은 어는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좁디좁은 시냇물 하나 건넌다고 자랑합니다. 어차피 모두 10미터 이상 멀리뛰기를 하지 못하는데, 나는 1미터 뛸 수 있다고 고개를 쳐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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