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92)


16.2.2. <블라인드 사이드(The Blind Side, 2009)>라는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빈민가에서 자란 흑인 소년 마이클 오어(Michael Oher, 일명 빅 마이크(Big Mike), 퀸턴 애런(Quinton Aaron)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를 리 앤 투오이(Leigh Anne Tuohy, 샌드라 불록(Sandra Bullock)이 배역을 맡았습니다)라는 백인 상류층 부인이 입양해서 양육하며 보살피는 영화입니다. 

A relatively small blonde women stands beside a large football player, facing away from the viewer.

리 앤이 마이클을 자기의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서 친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이클의 어머니인 데니스 오어(Denise Oher, 애드리안 레녹스(Adriane Lenox)가 배역을 맡았습니다)는 빈민가에서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사는 가여운 흑인 여성입니다. 마이클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안을 팽개치고 나갔습니다. 리 앤이 이 데니스에게 찾아와 마이클을 입양하겠으니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지저분한 데니스의 집에서 리 앤은 가급적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데니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리 앤의 진정성을 알고는 그만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러자 리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 데니스 곁으로 와 앉습니다. 지저분한 소파는 리 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술과 마약에 찌든 데니스가 가여울 뿐입니다. 그리고 리 앤은 아무 말없이 데니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여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리 앤이든 데니스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젠가는 나도 리 앤이 될 수 있고, 또 언젠가는 내가 데니스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손 한 번 잡아주는 것, 어깨 한 번 다독여 주는 것,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한 번 상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없이, 그 구멍난 손으로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것 말입니다. 예, 상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그 상상을 하며 이 부분을 쓰고 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아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흐느끼는 것 밖에는… 자, 진정하고... 나중에 빅 마이클은 미국프로풋볼팀의 하나인 볼티모어 레이븐즈(Baltimore Ravens)에 입단합니다. 

“너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네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거야.” 
“평소에 새벽기도하지 않으니 이 재앙이 너에게 닥친거야.” 
“십일조를 내지 않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거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노하셨어.” 
“네 마음이 완악하니 이런 일이 온게지.” 
“전도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어?” 
“그렇게 봉사하자고 불렀건만,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났구만.” 
“남편(또는 아내, 또는 자녀)이 교회에 안다니니까 그렇지.” 
“그것도 기도라고 하는 거야? 하나님은 그런 기도 듣지도 않으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서 당신 남편(또는 아내, 애들)이 잘 될 것 같아?” 등등… 

또는 제 3자에게 흘리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 있잖아? 이번에 부도가 났다는구만. 주일성수하지 않으니 그런 일을 당한게지.”
“소식 들었어? 아무개가 교통사고 당했다고 하네. 전도 안할 때 알아봤어.”
“세상에! 공부 잘하던 아무개 집사 아들말이야. 이번에 대학에 떨어졌다나봐. 내가 그 집사를 좀 아는데 말이야. 십일조 낸 적이 별로 없어.” 
“그 집사 말이야, 요즘 얼굴이 어둡던데… 우리가 모르는 죄를 짓고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 아니야?” 등등… 이런 말을 얼마나 쉽게 내뱉습니까? 또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하는지 모릅니다. 

또는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을 콕 찍어서 말하지는 않지만 에둘러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쎄요… 에둘러 말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까요? 차라리 대놓고 “너의 잘못은 이것이야.”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에둘러 말하는 것은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하고, 더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더 수치심을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창이 상대방을 찌르고 또 찌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말입니다. 나름대로 의를 피력하면서 말입니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십중팔구 “너는 얼마나 잘났냐?”입니다. 자연스러운 자기방어체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핑퐁게임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됩니다. 

쉽게 내뱉는 말들을 위에서 몇가지 적어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다고 봅니다. 그런 말을 활자로 이렇게 옮겨쓰는 자체가… 제가 그렇다는 말이지요… 은근히 나의 의를 드러내는 셈입니다. 어차피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지 못하는 것은 어는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나는 좁디좁은 시냇물 하나 건넌다고 자랑합니다. 어차피 모두 10미터 이상 멀리뛰기를 하지 못하는데, 나는 1미터 뛸 수 있다고 고개를 쳐듭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

유다서(101)

18.3.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모욕과 희롱은 계속됩니다. Crucifixion, from the Buhl Altarpiece, a particularly large Gothic oil on panel painting from the 1490s.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5-44)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홍포를 입힙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가시관을 씌웁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갈대를 쥐게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인사를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그 왕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며(마 27:42-43) 희롱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선심쓰는 척하며 이웃에게 조롱의 옷과 가시관과 갈대을 주지는 않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롱의 인사, 글자그대로 가시가 돋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평소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는 못할 망정, 어설픈 나의 잣대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서러움을 공...

유다서(119)

3. 오직 은혜(Sola Gratia):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몇 구절을 찾아봅니다. ‘은혜(헨, hen)’는 ‘호의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이시는 자비, 은혜, 사랑을 말합니다.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창 33:8)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 33:12). Hebrew letters spelling Chesed 또 ‘은혜(헤세드, chesed)’의 기본 의미는 ‘바라다,’ ‘사랑하다’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은총이나 자비, 사랑, 긍휼을 말합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너희가 이 일을 하였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리로 너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고, 나도 이 선한 일을 너희에게 갚으리니, (삼하 2:6)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