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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9)


21.1. 이렇게 자신을 세우며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in God’s love)” 자신을 지키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 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삶을 살아냄으로써(빌 2:12) 순종하고 신실할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3절과 20절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뿐입니다. 진리뿐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지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서로 맞물려 돌고 돕니다. 

21.2. 여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자비)이 있습니다. 그 긍휼이 성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사실 말이 기다림이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버스를 한 시간 이상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까?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하루나 이틀 동안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오래 기다려 본적이 있습니까? 정말 하루가 천 년 같습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얼마나 기다렸을까요(눅 15:11-32)?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8-13)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간에는 더디 오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하루는 천 년 같고, 또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 주권에 도전하지 맙시다. 말처럼 쉽지 않음을 압니다. 그러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판단하시기에 가장 좋은 때, 적합한 때가 있을 겁니다. 그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또한 경건의 한 부분이겠지요. 예전의 CCM이 생각납니다.

In His time, in His time 주님의 시간에
He makes all things beautiful 그의 뜻 이뤄지리
In His time         기다려
Lord, please show me everyday 하루하루 살 동안
As You’re teaching me Your way 주님 인도하시니
That You do just what You say 주 뜻 이룰 때까지
In Your time 기다려

In Your time, in Your time 기다려 그때를 
You make all things beautiful 그의 뜻 이뤄지리
In Your time 기다려
Lord, my life to You I bring 주의 뜻 이뤄질 때
May each song I have to sing 우리들의 모든 것 
Be to You a lovely thing 아름답게 변하리
In Your time 기다려

그렇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기다립시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듯, 우리의 불경건이 풀어져 경건하게 될 겁니다. 우리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데리고 갈 그 긍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며 세우고, 기도하며, 지킵시다. 유다는 그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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