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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8)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 20-21)

20.1. 유다는 몇가지 권면을 합니다. 먼저,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다. “너희는 … 자신을 세우며…” 어디에서 자신을 세우라고 합니까? 자신의 믿음 위에서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어떤 믿음입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지극히 거룩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다서 3절의 “단번에 주신 믿음”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 2:6-7)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면 됩니다. 그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뿌리를 박는 것이 아닙니다. NIV에는 이 말씀마저도 수동태(rooted and built up)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원래 그리스도 예수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뿌리내리게 하시고 세워주십니다. 아멘!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바울 선생님은 이것도 수동태(strengthened)로 썼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위대한 수동입니다. 아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믿음을 뿌리내리게 하시고, 세워주시고, 굳건히 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하는 것 뿐입니다. 

Praying Hands by Albrecht Dürer

20.2. 그리고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도를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수동적인 면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한 수동 안에서 가장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태도가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면서도,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말씀드리는 행위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나의 기도와 생활이라는 두 측면을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라고 하기는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인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저런 행동을 하면서 생활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생활인지 생각해 봅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기도입니까?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떼거지입니까? 그래서 ‘성령 안에서(in the Spirit)’ 기도하라고  하신 모양입니다. 나의 안위와 사리사욕보다 여러 성도를 먼저 배려하는 생활 말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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