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를 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유다서가 짧기 때문입니다. 긴 서신서나 예언서 등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평소에 설교에서 들어보지 못했고, 목사님들이 인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설교본문이나 인용구절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목사님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제가 그럴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다.
St Bernard in "A Short History of Monks and Monasteries" by Alfred Wesley Wishart (1900)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혹자는 지식을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호기심이라고 한다. 혹자는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허영이라고 한다. 혹자는 섬기기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아는 만큼 생각한다고 합니까? 아니면 생각하는 만큼 안다고 합니까? 제가 아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일천(日淺)합니다. 이런저런 각주와 관주, 그리고 라이프성경사전을 인용한 것을 보면 아실 겁니다. 그러니 지식을 추구합니다. 호기심, 또는 궁금증이 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 궁금증(호기심)이 경건을 따라가지는 못합니다. 저는 경건하지도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저의 경건하지 않음을 충분히 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난잡한 글을 쓰는 것이 남에게 알려지기 위해서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단지 허영을 쫓아가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평신도인 제가 이런 글을 쓴다는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가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아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모른다는 말이 맞습니다. 라이프성경사전과 이런저런 각주와 관주를 참고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참고사항―경건한 여러분들은 이미 이런 내용을 알고 있고 또 경건의 본을 몸소 실천하십니다―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글의 일관성이 없고, 이곳에 갔다가 저곳에 가는 등 혼란스러운 글―처음엔 A4용지로 20여 페이지 되는 분량(유다서가 짧은 책이라고 생각했는데)이었던 것이 어느새 120 페이지가 되었군요―이 되었습니다.
다 쓰고 난 다음에 드는 생각은 ‘역시나!’였습니다. 제 자신이 아둔하고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이미 이런 내용을 아시고, 경건한 행동을 하시고, 그리고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시는데, 어설픈 이 글이 여러분의 귀와 눈과 마음을 어지럽게 할까 두렵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두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자신의 아둔함과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두렵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 두렵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눅 5:4-7; 요 21:6), 얕은 물가에서(찬송가 302장 3절) 손과 발만 담근 글이라 두렵습니다. 그리고 인용한 구절을 잘못 생각했을까봐 두렵습니다. “이 구절은 이런 뜻이 아닌데, 이 친구가 잘못 알고 있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여러 사람의 객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저의 얕은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두렵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낱말과 표현의 부족이 두렵습니다.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궁금증(호기심)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버나드가 말한 허영이라는 허망한 것을 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지식으로, 사랑이라는 지식의 단계까지 가고 싶습니다. 비록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이 아무렇게나 쓴 글이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면(눅 19:31,34) 족합니다.
2,000년 전의 거짓 선생들에 대한 유다서를 읽으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 거짓 선생들이 바로 저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목회자나 또는 소위 말하는 인도자가 아니므로 양 무리를 이끌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목회자나 인도자가 아니더라도, 유다가 파헤친 거짓 선생들의 모습에서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특히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것을 따라가는 영적인 간음을 하는 두 마음을 품은 것 말입니다. 시종일관 그것이 저로 하여금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마음의 동기가 순수한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라고(유 3) 했지만, 정작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의해 살아간다는 것이 심히 어렵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물론 말로는 은혜, 긍휼, 자비 등등을 외치지만, 저의 생활을 살펴보면 은혜는 온데간데 없고, 자비는 찾아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하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서행일치(書行一致)! 글과 행동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글만 앞세우고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 없음을 도와 달라는(막 9:24) 앞뒤가 맞지 않으며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 비참한(곤고한) 죄인이(롬 7:24)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눅 17:13) 밖에는 구할 것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감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저와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고후 13:13). 그리고…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고백은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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