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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0)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유 22-23)

22.1. 유다는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합니다. 첫째는 의심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고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거짓 가르침을 받고 싶어서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믿음이 약하고 흔들리니까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겠지요. 저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제가 믿음이 없고 부족한 탓도 있습니다만, 뭔가를 조곤조곤 설명해 주고 설득시켜 주면 그나마 수긍하는 편입니다. 물론 나의 마음이 완악하고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 듣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제가 알아듣게 설명해 주고 가르쳐주면 조금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물론 우격다짐이 통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예전에 가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의심이 생기면, 덮어놓고 믿어라.’ 글쎄요... 반농담이지만, 성경책을 덮어놓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믿어라고 그렇게 외쳐도 믿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대, 의심하지 말고 덮어놓고 믿으라면 얼마나 믿을까요? 믿음이 약해서 답답한 경우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이런 어설픈 글이라도 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또 참으시고, 또 인내하시고, 또 긍휼히 여기십니다. 바로 앞절에서 기록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Sodom and Gomorrah from the Nuremberg Chronicle by Hartmann Schedel, 1493. Lot’s wife, already transformed into a salt pillar, is in the center.

23.1.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소돔과 고모라를 기억하십니까? 미련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소돔성이 불탈 때, 롯은 지체했습니다(창 19:16). 생활의 터전이 거기 있었으므로 미련이 있었겠지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지 않습니다. 그 어느 누가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떠나겠다고 결단하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말처럼 쉽게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봅니다. 롯이 지체하니까 “그 사람들{천사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창 19:16) 두 천사(창 19:1)가 각각 롯과 롯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성 밖으로 피신시킵니다. 천사들이 롯의 식솔들의 손목을 잡고 인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손을 잡는 것보다 손목을 잡으면 더 꽉 쥘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엔 손을 잡았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즉시 반응하며 순종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사람이 어디 그렇습니까? 최소한 저는 미적거리며 지체합니다. 미련스럽게 미련을 가지고 뭉기적거립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더하셔서 직접 손을 잡고 이끌어 내십니다. 두 천사가 롯의 가족을 이끌어 낸 것처럼, 거짓 선생들의 거짓 가르침이라는 불에서 건져내어 구원하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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