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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97)


16.5. …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거짓 선생들은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아첨(阿諂, flatter)하다’는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린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유리한 점(advantage)을 차지하기 위해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조금의 이익이라도 생길 기미가 보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듭니다. 특히 권력이나 재물을 가진 사람에게 달라 붙습니다. 온갖 감언이설과 뇌물로 높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씁니다. 

또는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도 아첨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자기의 이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힘이 없는 낮은 사람을 파멸의 길로 이끕니다 자기는 이익을 챙겼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요. 이들은 공정하게 행하지 않습니다. 아첨은 공존의 길이 아니라 공멸의 길입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 (레 19:1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7-19)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뇌물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십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고 나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결정합니까? 그렇게 결정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나도 나그네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리고 눈 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뇌물을 쓰지는 않습니까? 

‘상도(商道)’라는 드라마를 아십니까? 제법 오래전에 MBC에서 제작한 드라마입니다. 원래 소설이었는데 드라마로 만든 것이니다. 최인호 선생님의 작품이지요. 소설과 드라마가 꽤 다릅니다. 어쨌거나, 드라마에서 주인공 임상옥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가 정치수라는 인물입니다. 임상옥은 상도를 지킵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합니다. 장사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버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거부가 됩니다. 반면 정치수와 그 일당은 사사건건 뇌물을 사용합니다. 결국 그 뇌물에 자기의 발이 묶이고 맙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이용하지는 않습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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