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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2)


Ⅴ. 찬가(24-25)

마지막으로 유다는 찬가를 올립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유 24-25)

24.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히(able)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하나님께서는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십니다. 물론 이 본문은 연보에 관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어디 돈에 국한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 목적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는 것이지요. 미가서를 기억하십니까?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에 하나님의 능하신 은혜가 넘칩니다. 그 은혜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니다(마 6:33). 여기서 말하는 ‘먼저(first)’는 두번째(second) 또는 세번째(third)가 있는 먼저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히려 ‘오로지, 오직(only)’의 뜻입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동기로 구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동기에 나의 이익을 생각하거나 계산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무당에게 복채를 주면서 복을 비는 것이 가증스럽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음란입니다. 그것이 대리석처럼 굳어진 나의 완악한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십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후 4:14)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잡고 있으면 됩니다. 거짓에 현혹되지 않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분의 영광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골 1:22) 

그리고 흠 없는 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세워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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