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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3)


25.1.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 

우리 구주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과연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 글에서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무당을 섬기듯 섬기지 않습니까? 그저 나의 안위와 소위 말하는 복만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혼합종교를 만든 것처럼 나도 유교, 불교, 도교 등을 기독교와 합쳐서 음란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사상이 아니더라도, 돈이나 명예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습니까? 정말 풀리지 않는 저의 고민입니다. 

그 홀로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영광(榮光, glory)과 위엄(威嚴, majesty)과 권력(權力, power[NIV]; dominion[ESV])과 권세(權勢, authority)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습니다. 많이 들어보신 낱말들입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이 낱말들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었습니다. 역시 라이프성경사전의 도움을 받습니다. 영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5.2.1. 영광은 빛나는 영예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한 빛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긍휼, 완전성을 찬양하며 높이 드러내는 행위 등을 나타내며, 사람이나 사물과 관련해서는 ‘아름다움,’ ‘뛰어남,’ ‘명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다양한 단어가 있으나 대표적으로 ‘카보드’를 들 수 있습니다. ‘카보드’의 기본 의미는 ‘무거움’으로서, 어떤 중요함이나 가치를 나타내며, 이것이 ‘영광’(존귀, 광휘)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그분의 위엄이 넘치는 현현(임재)에 대한 표현으로서, 또는 초월한 광휘(위엄, 권위, 장엄)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지존함을 뜻하는 말로 묘사되었습니다(출 16:7; 24:16; 레 9:6). ‘카보드’에 상응하는 헬라어는 ‘독사(毒蛇, viper)’인데 이 단어의 기본 의미는 ‘의견’(판단)이며, 여기서 ‘평가’(평판), 그리고 좀더 발전하여 ‘영광’(영예, 광채)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시 19:1),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입니다(사 42:8). 특히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신 28:58; 느 9:5)과 위엄(욥 37:22; 시 93:1; 사 2:10), 권능(출 15:1; 롬 6:4), 역사(시 19:1; 111:3), 거룩함(출 15:11)을 통해 나타내셨으며, 그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 고후 4:6; 히 1:3). 또한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임재시에 나타내셨으며(눅 2:9), 또 하늘과 온 우주 가운데 나타내셨고(시 8:1; 113:4), 당신의 신실한 일꾼들(출 34:5-7; 행 7:55)과 거룩한 공동체 안에(신 5:24; 시 102:16; 계 21:11, 23) 나타내고 계시며, 종말에는 온 세상 중에 당신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합 2:14). 그리고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것입니다(유 1:24).

예수님은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가지셨고(요 17:5), 또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요 17:22; 벧후 1:17).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요 1:14). 한편,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표적과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셨지만(눅 24:26; 요 2:11; 히 2:9-10) 결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고(요 8:50),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요 7:18; 17:1, 4-5). 성부 하나님께서는 죽으신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또 하늘로 올리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고(딤전 3:16),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셨습니다(계 5:11-12).

또한 그리스도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마 16:27; 25:31). 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영원한 영광에 부름받은 자로서(살후 2:14), 장래에 영광받기로 예비된 존재입니다(롬 9:23; 고전 15:43; 빌 3:21).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광의 소망으로 삼는 성도는(골 1:27), 이 땅에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코 실망하지 말고(롬 8:18; 고후 4:17), 오히려 그 고난을 영광으로 삼고(엡 3:13) 이 땅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고전 10:31).

사람들은 이 땅에서 영광을 얻으려고 노력하지만(마 6:2; 살전 2:6)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유익하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시험거리가 됩니다(마 4:8). 현세의 모든 영광은 마치 들의 꽃과 같이(눅 12:27; 벧전 1:24) 순간적이요 일시적인 것이며(고전 15:40; 고후 5:12),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시 49:17). 영광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외면한 그 어떤 영광도 수치(호 4:7)와 파멸(사 5:14; 13:19)로 종결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롬 8:21; 벧전 1:7). 하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참된 영광을 안겨주실 것입니다(시 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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