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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4)


19.1.1.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 

거짓 선생들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분열을 일삼고 부추킵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4-6)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y, between 1408 and 1425

위의 구절에서 ‘하나(한, 통일 포함)’이라는 낱말이 몇 번이나 등장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이미 2,000여 년 전에 고린도에서는 분열이 있었습니다(고전 1:11-12; 3:4). 사도 바울이 그들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시기(jealousy)와 분쟁(quarreling)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에 속해서 시기합니까? 분쟁을 일삼습니까? 저는 우리나라 기독교(개신교)의 교파를 모릅니다. 알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라이프성경사전에 의하면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샘하여 미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는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부모의 편애, 사회적으로는 경쟁 의식이나 차별, 개인적으로는 실력이나 배경, 외모 등 열등 의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나(창 4:5-6, 8), 사라가 잉태한 하갈을 학대한 것(창 16:5-6), 남편 야곱을 차지하기 위한 라헬과 레아의 경쟁(창 30:1),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판 사건(창 37:19-20),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삼상 18:8-9, 29; 20:31), 신약 당시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로마 군병에 넘겨 죽음에 이르게 한 것(마 27:18; 막 15:10; 요 11:47) 등은 모두 시기와 질투가 빚은 사건들입니다.

한편, 헬라어로 ‘젤로테스’는 ‘시기,’ ‘질투’라는 부정적 의미 외에도(행 5:17; 롬 13:13; 고후 12:20; 갈 5:20; 약 3:16) 긍정적 측면에서 ‘열심,’ ‘열정’이란 뜻도 갖고 있습니다. 이 경우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간절한 심령을 나타내기도 합니다(요 2:17; 롬 10:2).

결국 이 시기(envy)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Christ before Pilate, Mihály Munkácsy, 1881

이는 그[빌라도]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막 15:10; 마 27:18)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그런 시기와 분쟁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이웃이 잘되는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걸 넘어서 시기하는 마음이 있는지요? 그 상태가 되면 분쟁은 오지 말라고 해도 쏜살같이 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괜히 생겼겠습니까?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잠 14:30)

시기하면 안색이 변하는 것은 물론이며, 뼈를 썩게 합니다. 시기(질투)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평온한 마음(tranquil heart)입니다. 그리고 그 평온한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요 14:27)으로부터 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1-4)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이런 우스개소리를 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와 고양이를 너무나 좋아해서 한 우리에 넣고 길렀답니다. 처음엔 개와 고양이가 서로 잡아먹을 듯이 행동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동물은 서로 잘 지내게 되었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내친 김에 다른 동물들(어떤 동물들인지 기억나지 않는군요)을 이 우리에 더 넣어 길렀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니나 다를까 처음에는 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곧 서로서로 잘 지내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번에는 한 집에 감리교인, 장로교인, 침례교인, 루터파 교인, 오순절파 교인 등 여러 명을 살게 했습니다. 그들은 처음 하루 이틀 동안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도 못되어 서로 싸우고 할퀴고 난리가 났답니다. 

혹시라도 내 마음에 시기심이 있으면 다음 구절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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