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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05)


19.1.2. 그런데 옛날 고린도교회에 분열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전 1:10-13)

많이 들어본 말씀일 겁니다. 교회의 분열… “나는 우리 목사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 장로님은 우리편이야.” 등등…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급기야 아무개파, 아무개파 등으로 나뉘어 싸웁니다. 믿음의 도(유 3)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야심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파에 속해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하려고 합니다. 이런 곳에는 혼란(disorder)과 모든 악한 일(every vile practice)만 보입니다(약 3:16).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으로 서로 싸우는데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나겠습니까? 

고린도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도 이 분열이 가장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해 씁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상상해 봅니다. 적이 바로 코 앞에 있습니다. 참호 속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언제 적이 총을 쏘며 달려들지 모릅니다. 적의 뒷편에서는 포병부대가 우리를 조준하고 있습니다. 적의 왼쪽에는 탱크부대가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적의 오른쪽에는 지원병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을 제대로 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그런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아군은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나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를거야.” “아니야, 나는 중대장의 편이야. 대대장은 이미 글렀어.” “무슨 소리? 전투에서 우리와 함께 총을 쏘며 돌격하는 분은 소대장이야. 실제 지휘하는 소대장의 명령을 따라야지.”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내면에 있다는 말이 참인듯 합니다. 나의 내면에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며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그런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한, 전쟁에서 이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 기를 들고서 접전하는 곳에 가신 것 보라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찬송가 351장 1절)

악한 마귀 제 아무리 강할지라도 우리들의 대장 예수 앞서 가시니
주저말고 용감하게 힘써 싸우세 최후 승리 얻을때까지
한마음으로 힘써 나가세 한마음으로 힘써 싸우세
악한 마귀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찬송가 350장 3절)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송가 413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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