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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93)


16.2.3. 거짓 선생들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들추어 내어 마음의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립니다.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비록 거짓 선생들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기어이 들추어내어 서슬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지는 않습니까? 비록 그것이 성경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물론 권면을 받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럽게 여기는 약점까지 들추어낼 필요까지 있을까요? 예쁘게 바른 벽지를 일부러 뜯어내어 못자국을 꼭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지 않아도 약점때문에 어지할 바를 몰라 자신을 한스럽게 여기는 이웃에게 말입니다. 저도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런 말을 서슴치않고 내뱉았을 겁니다. 하나님이여, 용서하소서. 나의 입술을 다스리소서. 믿음의 도(유 3)를 지키게 도우소서. 거짓 선생들처럼 허탄한 말을 하지 않도록 나의 마음을 다스리소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잠 17:9)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12)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약 5:19-20)

내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은 아닙니까? 내가 그 허물을 거듭 말하는 자는 아닌지요? 나는 남의 허물을 얼마나 덮어줍니까? 나에게 그 허물을 덮어줄 만한 사랑이 있습니까? 사랑으로 그 허물을 덮읍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제 3자의 허물을 속살거리며 말하더라도, 나도 거듭 말하거나 여기저기 옮기지 맙시다. 무덤에 갈 때까지 가지고 갑시다. 쉽지 않음을 압니다. 얼마나 입이 간질거릴까요? 사람의 죄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도(유 3)를 굳게 잡고 끝까지 누설하지 맙시다. 어떤 분이 그렇게 자꾸만 속살거리며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니, 그걸 듣던 분이 “됐네, 이 사람아.”라고 점잖게(?) 한마디 했답니다. 그 말에 능력이 있었던지 더 이상 허물을 찾아내는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됐네, 이 사람아.” 사용해볼 만한 대꾸라고 생각합니다. 정 참지 못하겠다면, 산(?)에 올라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나님께 아룁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1:26)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what he says)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horses)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2-3, 6, 8-12)

아예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 혀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저주하지 아니하고, 쓴 물을 내지 아니하고, 짠 물을 내지 아니하는 최소한의 소극적인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가장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한 입으로 찬송과 단 물과 나무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그럴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나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혀에 대한 모든 구절을 일일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혀를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주도권에 맡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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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거짓 선생에 대한 유다의 마지막 은유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은 공해 때문에 많은 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도시에서는 휘황찬란한 인공의 조명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이나 또는 광야와 같은 곳에서 찍은 밤하늘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캄캄한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말입니다. 막 쏟아지려고 하는 그 수많은 별들 말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유성(별똥별이라고 하죠?)이 지나가는 것도 사진에 담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지구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구를 위해 수많은 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 1:14-19) 큰 광명체는 태양일 것이고, 작은 광명체는 달이겠지요. 그리고 별들을 만드셔서 우주 전체의 별들로 징조(signs)와 계절(seasons)과 날(days)과 해(years)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145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다른 천체들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하지요. 지구의 나이는 45~6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의 말씀처럼 지구가 먼저 창조되고 해·달·별 등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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