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99)


18.1. 유다는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한마디로 요약정리합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먼저 라이프성경사전이 말하는 마지막 때(종말)를 봅니다. 시간이나 사건의 끝(마지막)을 뜻하는 말로써,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끝(민 23:10; 시 39:4), 우주적으로는 세사이 끝나는 시간(신 32:29), 그리고 구속 역사의 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말합니다(마 24-25장). ‘끝날(미 4:1),’ ‘말일(사 2:2),’ ‘후일’단 2:28),’ ‘말세(행 2:27; 벧전 1:20),’ ‘여호와의 날(암 5:18),’ ‘주의 날(행 2:20; 살전 5:2),’ ‘주 예수의 날(고후 1:14),’ ‘그리스도의 날(빌 1:10),’ ‘그리스도 예수의 날(빌 1:6),’ ‘하나님의 날(벧후 3:12),’ ‘그날(호 2:16, 18, 21; 딤후 1:18),’ ‘그 때(사 35:5-6),’ ‘그 후(욜 2:28),’ ‘이 모든 날 마지막(히 1:2)’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구약 시대의 종말관은 이중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군요. 즉, 지상에서의 당면한 재난이 종결되는 때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의 종 메시야로 인해 이뤄질 평화로운 세계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사 7:10-25; 렘 23:5-6). 그리고 여호와의 날로 일컬어지는 종말은 한편으로 심판과 징계의 측면이 있으나(사 11:11-16; 욜 3:16-21),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측면도 담겨 있습니다(사 29:6; 35:4). 종말의 징조로는 전쟁(사 19:2; 대하 15:6), 기근(렘 15:2; 겔 5:16-17), 지진(시 18:7; 사 24:19),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사 11:1-2; 61:1-2; 욜 2:28-32) 등이 있을 것인데, 이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집니다(사 24:1).

신약 시대의 종말관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 예수가 오셨다는 그 자체가 종말적인 사건이요 마지막 때의 증거가 됩니다(사 26:19; 렘 33:15-16; 요 5:25). 특히 예수께서는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시면서 종말의 때에 있을 큰 환난과 당신의 재림, 그리고 심판과 그에 따른 현세에서의 준비를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마 24-25장).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초대 교회는 임박한 재림을 고대했으며(살전 4:14-1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가르쳤습니다(벧전 4:7; 계 1:1-3).

한편, 신약성경에서 종말의 진행 과정으로, 예수의 재림(눅 21:5-36; 살전 4:16; 살후 1:7; 계 1:7)과 죽은 자들의 부활(롬 8:11), 최후 심판(마 25:45-46; 계 20:12)과 세상의 종말(벧후 3:1),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벧후 3:13; 계 21:1-2)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종말의 징조로는 전쟁(마 24:6)과 지진(눅 21:11), 기근(막 13:8), 격렬한 환난(마 24:9, 21-22) 등이 발생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와 불법한 자들이 일어나고(살후 2:3; 요일 2:18), 배교(背敎)가 있을 것이며(마 24:10-12; 살후 2:1-3),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마 24:14).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1)

1.6. 조금만 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앞에서 부르는 것과 택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좀 길지만 다 옮겨 봅니다. Parable of the Great Banquet by Brunswick Monogrammist (circa 1525), location: National Museum, Warsaw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4) 왕자의 혼인은 아니지만, 여러분도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가 당연히 있을 줄 압니다. 그 결혼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나라의 왕자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

유다서(100)

18.2. 이 마지막 때에 경건하지 않은 욕망을 따르며 조롱하는 자들(mockers[KJV, NASB], scoffers[NIV, ESV])이 있을 것입니다. ‘조롱(嘲弄)하다’는 ‘비웃거나 깔보면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은 ‘기롱(譏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롱하다’는 ‘실없는 말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조롱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많은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옮깁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상상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비웃고 깔보면서 놀리면, 아버지를 실업는 말로 놀리면, 그렇게 조롱하는 자식의 눈이 까마귀에게 쪼인답니다. 독수리가 와서 그 시체의 살점을 새끼에게 먹이로 준답니다. 거의 공포영화 수준입니다.  ,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 17:5)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 14:31)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비웃음까지 당합니다. 버스비가 없어서 부르튼 발을 끌며 걸어가는데, 깔보는 시선까지 느껴집니다. 자식을 학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놀림을 받습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Édouard Manet, Jesus Mocked by the Soldiers, c. 1865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

유다서(1)

< 진리 전쟁: 유다서(JUDE) > 위승섭 Papyrus 46, one of the oldest New Testament papyri, showing 2 Cor 11:33-12:9 신약성경의 짧은 책 중의 하나인 유다서에 대한 설교를 들어보지도 못했고, 구절을 인용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도대체 유다서는 어떤 책일까라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영성―성경에 영성이라는 낱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니 경건하지 않은 제가 유다서를 파악한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어성경의 관주와 각주, 그리고 라이프성경사전을 참고하여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적어보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예, 욕심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참고했지만 저 개인의 생각이 들어가 있음을 밝힙니다. 생각하는 만큼 안다고 했던가요? 일천한 저의 생각이 이 글을 읽는 분들의 눈과 귀와 마음을 어지럽히지는 않는지 두려울 뿐입니다.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경건이라는 측면에서도 모자라는 사람이 그냥 느끼고 생각한 대로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을 참고하다보니 이야기가 일관성이 없고 여기저기 왔다갔다 할 겁니다. 한가지 더 밝힐 것은 참고 구절을 한 절만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맥을 살피기 위해 앞뒤 구절을 다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저의 생각을 다스려 주시기를 기대하며, 시작합니다.  Ⅰ. 인사(1-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 1)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은 1절에서 자신을 밝힙니다. 야고보(James; Ja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