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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1)


23.2. 그 다음 구절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그래서 공동번역을 찾아보았습니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사악한 자들은 너무나 부패한 존재로 그려져서 심지어 그들의 옷마저도 오염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사탄의 영향력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큽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면 영적으로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악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 느끼겠지요. 제 주위에는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는데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기도가 잘 안된다는 분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데 섬뜩함을 느끼는 분도 있었습니다. 맛있게 음식을 먹었는데 몸이 이상해서 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제사상에 올라왔던 음식이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영적인 능력이 그것을 느끼게 하는 모양입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게 민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어쨌거나, 그 죄는 미워하되, 두려움으로(mixed with fear, 조심스럽게) 긍휼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그 옷이나 그 사람에게 오염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The Sardis Synagogue

‘옷(garment[KJV, NASB], clothing[NIV])’이라는 낱말 옆에 계시록으로 가보라는 관주가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1-6)

라이프성경사전을 찾아보니 ‘사데(Sardis)’는 ‘남은 물건’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소아시아의 서부 루디아 왕국의 수도이며 상업과 군사 도시였습니다. 서머나(Smyrna) 동쪽 85㎞ 지점에 위치했다고 하는군요. 특히 사데를 수비하는 성곽은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와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 때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을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한때 번성하여 염색과 보석 공예로 유명했고 최초로 금·은 주화를 주조하여 사용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사데에는 키벨레 여신의 밀의(密儀) 종교가 성행했는데(계 3:1),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우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살았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기도 하였습니다(계 1:11; 3:1-6). 구약의 ‘사르밧(Zarephath)’과 동일 장소로 추정됩니다(옵 1: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우상에 빠져 곧 죽게 될 남은 자들에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신실하게 도울 것(strengthen)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받은 것과 들은 것을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고(일깨어, wake up) 하십니다. 그러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깨끗한 흰 옷입니다. 깨끗한 흰 옷에 대해서는 이 글의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자들은 합당합니다(worthy). 라이프성경사전의 설명처럼 사데가 염색 산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일까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으로 더러워진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죄악은 미워하되, 미혹에 빠진 사람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제 자신에게 또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더러워진 옷을 입은 것을 볼 때, 그 옷을 미워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미워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내가 깨끗한 흰 옷을 입은 자입니까? 아니면 나도 더럽혀진 옷을 입고 있습니까? 

스가랴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번 인용한 구절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슥 3:1-5)

만군의 여호와께서 사탄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 꾐에 빠진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십니다. 할렐루야! 정결한 관까지 씌워주십니다. 아멘! 공동번역의 기록처럼 거짓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의 더럽혀진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능히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고, 정결한 관을 씌워 주십니다(눅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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