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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96)


16.4.1.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

거짓 선생들은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조금 전에 본 그 혀로,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남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수치의 거품일 뿐인 자랑을 늘어놓기에 바쁩니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벧후 2:18) 

이제 겨우 올바른 길로 들어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것도 음란으로써 유혹합니다. 몇번이고 말씀드리지만, 음란, 육체의 정욕 등이 성적인 말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지 못하고 무당을 섬기듯 섬기는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며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해서 의무적으로 섬기는 것 말입니다. 그것도 섬기는 체 하는 것 말입니다.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 이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구나. 더 지성을 드려야지.’ 얼핏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나의 온 존재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동기가 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할진대, 여전히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과 다른 것을 동시에 섬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엄청나고 가증스러운 음란을 매일 저지르는 비참함에 빠져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지 싶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합니까? 하나님을 섬깁니까? 아니, 섬기려는 흉내라도 냅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생각합니까? 내 마음의 순수한 동기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누구를 바라볼까요? 

16.4.2. 남이 잘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잘 못하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지만, 대화 중에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가 잘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고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게 곱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언가를 잘 못하는 사람의 열등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가뜩이나 열등감에 빠진 사람을 앞에 두고, 그 잘 못하는 것을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더 심한 열등감으로 빠지고, 자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그 열등감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을 모르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입니다. 무언가를 잘 하는 사람의 배려심이 조금만 더 있으면 서로서로 행복할텐데...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고후 10:13, 15-18)

나는 나의 분수를 넘어서는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고 마음이야 인간이면 다 가지고 있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저도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남이 정해 놓은 기준으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고후 10:16). 설령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허탄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려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고후 10:16).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랑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고후 10:17). 그리고 어쩔 수 없이(부득불) 자랑하려면 약한 것을 자랑하라고(고후 11:30) 합니다. 

보통 자랑은 자기가 잘하는 것, 자기의 강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강점(장점)을 보이라고 합니다. 이력서를 작성하신 분은 다 아십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약점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려는 회사는 없을 겁니다. 모자라고 약한 것을 드러내면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일 겁니다. 그 회사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한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세상과는 전혀 반대이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힘든 모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강점을 자랑하면 주님이 필요없겠지요. 내가 잘하고 있는데 왜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약하니까, 내가 모자라니까, 아둔하니까, 어리석으니까, 미련하니까, … 죄인이니까,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내 마음의 번민과 고뇌를 아시는 주님만이, 오직 주님만이 칭찬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지요(고후 10:18). 거짓 선생들과는 달리 나도 내 자신을 칭찬하고 자랑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습니다. 주님의 칭찬이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경지까지 오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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