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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94)


16.2.4. 성경에는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키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먼저 사도 베드로는 하나의 마음(unity of mind)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분열하지 않고 통일된 하나의 마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다양한 심리, 사고, 행동을 무시하고 일정한 틀에 넣어 인위적으로 규격화하고 동질화하는 경향인 획일(劃一, uniformity, standardization)을 이루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양성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나누어지지 않는 일치된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나는 어떤가요? ‘일치’라는 명분으로 형제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지는 않습니까? 나의 생각이나 방침만을 고집하지는 않습니까? 다양성 속의 일치. 서로 이루어내어야 할 미덕입니다.

그리고 동정(同情, sympathy)을 가지라고 합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자세를 가지라고 합니다. ‘sympathy’는 ‘함께(together)’라는 그리스어 syn과 ‘감정, 느낌, 마음(feeling)’이라는 뜻의 pathos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형제의 감정과 느낌과 마음을 함께 하라는 말이지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저는 타인을 ‘소 닭보듯이’ 하는 경향이 강해서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니 생각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 되어버린 듯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형제의 사랑(brotherly love)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 마음으로 동정을 품으면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부드러운 마음, a tender heart)이 듭니다. 그 결과 겸손한 마음(a humble mind)이 생깁니다. 글쎄요, 제가 억지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첫 단추는 일치입니다. 하나의 통일된 마음이 동정을 일으키며, 그 동정이 형제애로 발전하며, 그 형제애는 부드러운 마음일 수 밖에 없으며, 그 부드러운 마음은 겸손한 마음을 낳습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그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욕을 욕으로 갚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획일이 아닌 하나로 일치된 공동체에 속한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마음(동정심)이 불일듯 일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반대로(오히려, on the contrary) 복을 빌게 됩니다. 이렇게 복을 비는 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우리에게 이어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벧전 3:10-11)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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