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115)


마쳤습니다. 총정리 들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제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도 자문해 보십시오.

거짓 선생들은 
1) 경건하지 않습니다(유 4). 
2)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꿉니다(유 4). 
3)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유 4). 

거짓 선생들은 
1)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유 5). 
2)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자들입니다(유 6). 
3)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유 7). 

거짓 선생들은 
1) 가인의 길에 행하였습니다(유 11). 
2)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습니다(유 11). 
3)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습니다(유 11).
거짓 선생들은 
1) 애찬에 암초입니다(유 12). 
2)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유 12).
3)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입니다(유 12).
4)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입니다(유 12). 
5)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입니다(유 13).
6)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입니다(유 13).

거짓 선생들은 
1)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들입니다(유 16).
2)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유 16).
3)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입니다(유 16)

거짓 선생들은 
1)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유 19).
2)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유 19).
3)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유 19).

그러나 우리는 
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합니다(유 17).
2)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웁니다(유 20).
3) 성령으로 기도합니다(유 20).
4)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지킵니다(유 21).
5)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립니다(유 21).
6)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깁니다(유 22-23). 그리고
7) 하나님께 찬가를 올립니다(유 24-25).

저도 하나님께 찬가를 올립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2)

18.4. 베드로 사도에 의하면 조롱하는 내용이 이렇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3-7) 역시 개역 개정판은 점잖게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벧후 3:4, 공동번역)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동번역이 경박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위 공동번역의 구절을 빈정대는 감정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경위를 압니다. 엿새 동안의 창조에서 셋째 날의 창조 기록(창 1:9-13, 벧후 3:5)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Noah)때의 홍수 심판 사건(창 6:5-8:14)을 압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方舟, ark)를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방주의 히브리어 ‘테바’는 원래 ‘상자,’ ‘궤’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는 노아의 방주(창 6:14) 외에 모세가 나일 강물에 버려질 때 담겨진 ‘갈대 상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출 2:3, 5). 그리고 헬라어 ‘키보토스’는 ‘나무로 된 상자’(a wooden box), ‘궤’라는 뜻으로, 방주(마 24:38; 히 11:7; 벧전 3:20) 외에 언약궤(히 9:4; 계 11:19)를 일컫기도 합니다. 방주란,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홍수를 피...

유다서(66)

11.3.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 거짓 선생들은 삯, 그것도 불의의 삯을 위하여 발람(Balaam)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습니다. 짝이 되는 베드로 사도의 편지의 한 부분을 봅시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5-16) 유다서 11절의 발람의 이야기로 갑니다. 민수기 22장에서 24장에 발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Moab) 평지에 진을 치고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Jericho) 맞은 편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모압 왕은 십볼(Zippor)의 아들 발락(Balak)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 때문에 번민하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브올(Beor)의 아들 발람에게 사신을 보냅니다. 물론 복채를 주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과 함께 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신들이 이 소식을 모압 왕에게 전하자, 그는 첫 번째 사신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모압 왕에게 가되 하나님이 이르시는 말씀만 준행하라고 반쯤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 나귀를 타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든 것을 보고 더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합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왜 때리느냐고 추궁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혀서 여호와의 사자를 보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도록 허락하십니다. 발람이 도착하자 발락은 융숭한 대접을 합니다.  Balaam and the Ass. by Rembrand...

유다서(23)

3.5. 모세와 불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쓴 <유대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모세가 에디오피아인들과 싸운 경위의 일부분을 옮깁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있었을 때 에디오피아인들이 이집트를 침략해서 이집트인들의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에 이집트인들은 모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집트의 서기관들은 모세의 용맹으로 적을 물리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모세가 전사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기뻐했으나, 히브리인들의 서기관들은 장차 모세가 그들의 장군이 되면 이집트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모세는 적들이 그의 공격을 알아차리기 전에 군대를 거느리고 적들을 저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수로가 아니라 육로로 행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육로로 행군하면서 그의 지혜가 매우 뛰어남을 실증해 보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많았기 때문에 (이곳 뱀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번식력이 뛰어나며 독성이 특히 강한 데다 보기에도 유달리 흉측해 보였습니다. 어떤 뱀은 눈에 띄지 않게 땅에 숨어 있다가 솟아 올라 공중을 날아 부지중에 사람을 덮쳐 해를 가하기도 했습니다). 육로로 통과하기가 어려운데, 모세는 군대가 해를 입지 않도록 무사하게 보호하는 멋진 계책을 창안해 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초(sedge)로 방주 모양의 바구니를 만들고 그 속에 이베스(ibes)라는 새들을 담아 들고 갔습니다. 이 새는 뱀들에게는 최대의 천적인데, 이 새들이 접근하면 뱀들은 도망을 쳤습니다. 뱀들은 도망을 치다가 이베스에 의해 잡혀 먹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베스는 길들여진 동물이며 단지 뱀 종류에게만 해를 끼쳤습니다. 모세는 이런 뱀들이 서식하는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이베스를 풀어 놓아 뱀들을 물리쳤고 군대가 그 지역을 통과할 때까지 이베스를 이용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렇게 행군을 거듭해 에디오피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