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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1)


1.6. 조금만 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앞에서 부르는 것과 택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좀 길지만 다 옮겨 봅니다.


Parable of the Great Banquet by Brunswick Monogrammist (circa 1525), location: National Museum, Warsaw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4)

왕자의 혼인은 아니지만, 여러분도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가 당연히 있을 줄 압니다. 그 결혼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나라의 왕자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왕자의 아버지인 임금님은 여러 사람을 초대합니다. 정치, 문화, 사회의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혼인 잔치에 부릅니다. 6개월 전에(그냥 제가 하는 말입니다.) 왕자의 결혼 소식을 발표할 때부터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이제 부름을 받은 그 손님들이 혼인 잔치에 와서 마음껏 축복하고 함께 즐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결혼 당사자인 왕자와 신부에게 축복의 말도 하고 건배도 할 겁니다. 신부와 함께 춤을 출지도 모릅니다. 서양 영화에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왕궁의 주방에서는 끊임없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인들은 손님들의 자리도 미리 정했습니다. 손님들의 아이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손님들에게 불편한 점이 혹시라도 있을까봐 다시 살피고 또 살핍니다. 6개월 동안 리허설을 수없이 했습니다. 임금님과 왕비도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제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이 왕궁으로 와서 축하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Jan Luyken: the invitation, Bowyer Bible.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한 정치인은 선거 운동해야 한다며 자기의 표밭으로 갑니다. 한 재벌의 총수는 중요한 해외사업으로 출국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왕자의 혼인이 아니라 자기의 표입니다. 기업가에게 중요한 것은 왕자의 혼인이 아니라 해외 기업과의 계약입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있어야지 표를 얻든, 해외 기업과 계약을 맺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임금님이 초청했는데… 그것도 6개월 전에 미리 알렸는데…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임금님의 초청에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임금님의 부름에 공공연히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청와대에서 나를 불렀다고 생각해 봅시다. 청와대가 와닿지 않으면 회사의 사장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아니면, 부서의 회식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답할까요? 만사를 제쳐놓고 갈 겁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임금님의 다스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기회에 가서 따져보자는 생각을 하더라도 일단 초청에 응할 겁니다. “임금님, 이런 것은 임금님이 잘못하셨습니다. 저런 것은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겠어요?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의 표밭으로 가고 해외 기업과 계약하러 가는 것은, 임금님이나 왕자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 임금님과 왕자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임금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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