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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8의 게시물 표시

유다서(19)

Ⅱ. 편지의 이유(3-4) 바뀐 주제(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으니, (유 3) 3.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던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  구원(salvation)이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우스개 소리로 십원의 십일조(tithe)인 일원을 하나님께 드리니 구원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건 한낱 우스개 소리일 뿐이고, 구원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봅니다. 역시 라이프성경사전을 참고합니다. 구원의 기본적인 뜻은 노예 상태나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행위, 또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행위입니다. 구약 시대의 구원은 주로 어떠한 위험이나 악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패전(출 15:2), 고통(시 34:6), 폭행(삼하 22:3), 조롱(시 57:3), 포로(시 106:47), 사망(시 6:4), 죄(겔 36:29)로부터의 구출입니다. 이 구원 행위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출애굽이지요. 따라서 구약 시대 초기에 ‘구원’은 민족적인 성격이 우세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왕국 시대로 오면서 점차 선지자들에 의하여 구원의 개념이 확대되면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에 포함되었고(왕상 8:41-43; 사 52:10), 개인 차원에서의 구원도 점점 증가되었습니다. 곧, 구원은 집단적으로 민족 전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난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남은 자, 곧 의인들에게만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더욱이 구약 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메시야 사상이 발전하여 구원 개념은 점점 ‘죄로부터의 구원’과 ‘메시야 왕국의 도래’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곧 구원자 메시야는 죄와 죄의

유다서(18)

2.7. 긍휼(자비), 평강(평안), 사랑… 이 낱말들에 있는 공통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또는 주도권(initiative)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주도권 말입니다. 저는 긍휼(자비)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의 내면에는 평강(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고백했듯이,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이웃조차도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제 자신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말은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긍휼을 베풀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마음의 평강과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어보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평안의 관계를 가지려고 애씁니다. 다시 말해서 주도권을 제가 쥐려고 했습니다. 제가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낱말들을 찾아 읽어보니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평안을 나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실 때 나는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고백했듯이 나는 긍휼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속에는 자비심이 없습니다. 평안과 사랑은 두 말할 것도 없지요. 사람이 태어납니다. 갓난 아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그 아기를 키웁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아기는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됩니다. 그는 어릴때 받은 그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저에게는 애초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만약 있다면 하나님이

유다서(17)

2.6. 좀 길어지지만, 사랑(love)도 찾아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최고 본질(요일 4:8, 16)과 기독교인의 가장 큰 덕목(고전 13:13)으로 제시되는 사랑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필수적입니다(롬 13:8-10).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 주신 신적(神的)인 사랑이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요일 4:10). 따라서 모든 사랑은 그 근원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사랑에 근거하여 성도는 이웃을 섬겨야 하며(갈 5:13), 거짓 없는 사랑을 해야 하고(롬 12:9),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요일 3:18). 이 모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곧 사랑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특히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사 55:7). 이 사랑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이스라엘의 변절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징계를 할지라도 이는 당신께로 되돌려 원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요, 징계하신 후에는 더 큰 사랑으로 위로하십니다. 곧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 없이 깊고 확고하며,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범죄하는 백성을 이방(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지만 70년 후에는 다시 본토로 회복시키신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변함 없으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입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사랑은 보다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

유다서(16)

2.3. 내친 김에 비슷한 뜻의 자비(慈悲, mercy, kindness)도 찾아보았습니다. 깊이 동정하며 불쌍히 여김(눅 6:36; 약 5:11)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진노를 그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것(느 9:17; 딛 3:4-7), 원수나 이방인을 적대시하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레 19:34; 눅 6:34-35),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약자 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그들을 도와주려는 긍휼의 마음(욥 6:14; 시 5:8; 25:6; 잠 14:21), 슬픔이나 부족을 위로하는 친절(빌 2:1),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출 22:27; 눅 6:36; 약 5:11). 한편, ‘자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으로서(신 4:31; 히 2:17; 마 5:43-48; 벧전 1:3-5), 풍부하며(느 9:17; 사 63:7), 차별이 없고(눅 6:35), 인간의 범죄에 구애받지 않고(시 78:38; 86:5, 15; 행 26:16-18), 영원합니다(대상 16:41; 사 54:8). 하나님은 이 자비에 기초하여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구원하십니다(시 103:4; 애 3:22; 욜 2:13; 미 7:18; 딛 3:5). 따라서 자비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참된 그리스도인의 품성이어야 하며(눅 6:36; 약 2:1-13),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갈 5:22-23). 2.4. 그럼 라이프성경사전은 은혜(恩惠, grace)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기쁨이나 상냥함, 사랑스러움’ 혹은 ‘호의나 친절, 자비, 긍휼’ 그리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사랑’ 등을 의미합니다. 그중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선물(창 6:8), 특별히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초월한 사랑이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유다서(15)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 2) 2.1. “긍휼과 평강”은 유대인들의 흔한 인사였다고 합니다. 이것에 “사랑”이 첨가되었습니다. 참고로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긍휼이라는 낱말 대신 ‘자비’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그건 그렇고, 신약성경의 이곳에서만 이 3가지 특징들이 함께 나타난다고 합니다. 율법과 행위가 있는 곳에는 실패와 죽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은혜(grace)가 있는 곳에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풍성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4)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2.2. 라이프성경사전에 나오는 긍휼(矜恤, mercy)을 볼까요? 다정히 사랑하며 측은히 여김(시 25:6), 불쌍히 여겨 동정함(pity), 상대방에 대한 불붙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고 은혜를 베푸는 것(눅 1:54)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하밈’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형이 동생에게 가지는 애틋한 정을 의미합니다(시 103:13; 사 13:18). 따라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세 역시 부모형제 사이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심정으로 행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chesed)’입니다. 이 말은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역시 ‘긍휼’로 번역되는데, 특히 호세아 선지자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택한 백성 이스라

유다서(14)

1.8. 부르고 부름을 받는 관계… 우리는 성경에서 귀신들린 자(엄밀히 말하자면, 귀신)가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이 나(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우리)를 멸하려 오셨습니까? 나(우리)를 괴롭게 하지 마시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입니다(마 8:29; 막 1:24; 5:6-8; 눅4:33-34; 8:28).”라고 말하는 장면을 봅니다. 귀신의 이런 말에서 두어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귀신 같이 압니다. 귀신도 아는 예수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까? 굳이 베드로의 고백(마 16:16; 막 8:29; 요 11:27)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선뜻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예수가 누구야?”라고 물을 때, 베드로의 고백을 되뇌이는 것 말고, 내가 아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저의 경건이 모자라고 믿음이 어리다는 반증이겠지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b)  혈육이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 교사들에게 배운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 즉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혈육을 통해,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성경 교사들을 통해 알게 해주셨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절대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통해 알게 해주셨습니다. 한꺼번에 다 알지는 못할지라도 조금씩 조금씩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귀신들이 하는 말을 잘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을 괴롭게 하고 자기들을 멸하려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

유다서(13)

1.7. 유다는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라고 말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지키심을 받은(kept) 자입니다. 누가 지켜주실까요?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의 그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지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Jesus Christ)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시작해서 주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셔서, 영생을 위해 믿는 이를 보전하시고 지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다음 말씀들을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37, 39, 40, 44)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28-30)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1, 15)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

유다서(12)

1.6.1.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각계각층의 나머지 지도자들은 임금님의 사자들(messengers)을 잡아 욕을 보이고 죽입니다. 이건 신앙을 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너무한 일입니다. 아무리 임금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한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비유에 과장법이 많이 들어있지만, 임금님의 사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가 바리새인들이 들으라고 하신 비유이지만, 저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핍박하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그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건 너무 심합니다. 쿠데타입니다. 반역입니다. 반란입니다.  여러분이 임금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쿠데타를 그냥 두겠습니까? 임금님과 왕자를 무시하는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잔치에 오라고 부르런 간 사자들까지 죽이다니요? 그래서 임금님은 철저한 응징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자들을 다시 보냅니다. 그만큼 왕자의 혼인 잔치는 중요합니다. 이제는 지도자층을 부르지 않습니다. 왕궁 밖에 나가 아무나 불러들입니다. 만나는 대로 초대합니다. 닥치는 대로 초청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궁의 혼인 잔치 자리는 채워집니다.  1.6.2.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임금님이 잔치 자리에 와서 보니, 한 사람이 예복(wedding clothes)을 입지 않은 채로 앉아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예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아무나 초청해 놓고 갑자기 예복이라니? 사자들이 길에서 만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초청한 사람들에게 예복이 있을리가 있나? 임금님이나 왕자님만 예복을 입으면 됐지, 나까지 예복을 입을 필요가 있는가? 그저 좀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가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J

유다서(11)

1.6. 조금만 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앞에서 부르는 것과 택하는 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이 좀 길지만 다 옮겨 봅니다. Parable of the Great Banquet by Brunswick Monogrammist (circa 1525), location: National Museum, Warsaw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4) 왕자의 혼인은 아니지만, 여러분도 결혼식에 참석한 경우가 당연히 있을 줄 압니다. 그 결혼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나라의 왕자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왕자의

유다서(10)

Miraculous catch of fish 1.5.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불러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기분 좋은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따뜻한 음성으로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내가 고민하고 번민할 때, 어찌 할 바를 몰라 두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 무서워 발걸음을 뗄 수가 없을 때, 두려워서 무릎이 덜덜 떨릴 때, 간담이 다 녹아내릴 때, 번뇌로 내 가슴이 검은 숯덩이가 되어 정신이 아득할 때, 그 숯덩이가 다 타서 허연 재만 남았을 때,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될 때, 나같은 사람이 살아서 뭘 하겠느냐고 자포자기할 때, 그 어디를 바라보아도 구원의 손길은 다가오지 않을 때,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 지 전혀 모를 때, 완전한 흑암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내 자신이 나의 존재를 부정할 때, 누군가가 나즈막한 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창조주, 가장 완벽하시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그 분의 존재 안에서 격려하시고, 등을 토닥거려 주시고, 얼싸안아 주신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이 황홀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아니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지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결국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눅 15:11-32)처럼 실제로 떠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나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십니다. 매일 매순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십니다. 왜 간섭하느냐고 원망 아닌 원망을 할 때도, 죄의 무게에 짓눌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울먹거리며 말할 때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분께서 “괜찮다.”고 하시면서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십니다. 좁은 생각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유다서(9)

1.4.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유다서 1절 하반절에서 유다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밝힙니다. 부르심을 받은자? 누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그리고 그 부른 이는 무엇때문에 불렀을까요?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뭔가 할 이야기가 있고 시키실 일이 있어서 부르셨을 겁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사랑을 얻은 자입니다. 내가 사랑을 주는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사랑을 얻는 입장(beloved)입니다. 어디에서 사랑을 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in God the Father)입니다. 저는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하면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 로마서 8장 28절의 구절이 너무나 아름답게 들리지만, 좁은 저의 생각으로는 동시에 너무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인데, 과연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가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너는 마음(heart)을 다하고 뜻(soul)을 다하고 힘(strength)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다시 말해 너의 모든 것으로, 너의 모든 됨됨이로, 너의 모든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겠지요. 모든 존재는 커녕 일부분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렇게

유다서(8)

1.3.7. 부르심의 일곱째 목적은 복(blessing)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An elderly Isaac blessing Jacob, oil on canvas by Govert Flinck, 1638 이 구절을 찬찬히 읽어보니, 나를 위해 복을 빌라는 말씀이 아니군요. 모두 사이 좋게 조화를 이루어(마음을 같이 하여, harmonious) 같은 마음을 가지고(동정하며, sympathetic) 복을 빌라고 합니다. 영 안에서(in spirit)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brotherly), 친절한 마음으로(kindhearted),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humble) 복을 빌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복은 “남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speak well of),” 즉 “칭송하는 것(eulogize)”입니다. 칭송(eulogy)이라는 낱말은 ‘좋은’ 또는 ‘진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u와 ‘말’이라는 뜻의 logia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에서 ‘고인에 대한 추도 연설’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사도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좋은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복을 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비방하는 사람에게 주는 복은 그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그의 구원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행복(well-being)을 바라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나의 복을 위해 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좋은 말 해주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지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3.8. 그리고 NASB에

유다서(7)

1.3.5. 부르심의 다섯째는 소망(hope)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4)  연인들이 만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남편에게 겉으로는 합당하게 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좀 심하게 말해서 간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화평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합당하게 행하시며 거룩한 소망을 품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면, 그것은 불순종의 단계를 넘어서는 영적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 심한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소망 안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딴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 말입니다. The Lord's Prayer in Greek Message에서는 이 구절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같은 길에서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도록 모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나 마음으로나 함께 하십시오.” (엡 4:4, Message, 저자 번역)  그렇군요. 우리는 믿는 이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같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서로 다른 길을 가거나, 또는 같은 길을 가더라도 방향이 다르면 소망이 아니라 갈등만 일어납니다. 한두 번 경험해 본 것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가지고 부르셨는데, 나는 다른 길로 또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해도, 마음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 하나님, 용서하소서. 하나님과 한 소망 안에서 여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는 모양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1.3.6. 부르심의 여섯째 목적은 거룩(holiness)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유다서(6)

1.3.4. 부르심의 넷째 목적은 합당하게 행하는 것(a worthy walk)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3)  worthy는 ‘훌륭한,’ ‘...에 어울리는’이라는 뜻의 낱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훌륭하고 어울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 다음의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겸손(謙遜,humility)과 온유(溫柔, gentleness), 그리고 오래 참음(patience)이라는 덕으로 용납(관용, tolerance)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물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한 용납입니다. 그리고 평안(peace)의 끈(매는 줄, bond) 안에서 성령의 하나됨(unity)을 지키기 위해 힘쓰라고 합니다.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시고 힘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겸손합니까? 설령 잘하는 것이 있더라도 자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높게 생각하는 그런 겸손을 지니고 있습니까? 온유합니까? 온유는 마음이 부드럽고 행동이 친절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자세, 곧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주께 순종하는 자세로 이웃을 대하는 마음가짐, 혹은 고통이나 억울함 심지어 굴욕 속에도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심령을 견지하고 겸손히 참아내는 고상한 인격을 뜻합니다(민 12:3; 시 25:9)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마 5:5)  내 안에 이런 온유라는 덕이 있는지요? 나는 오래 참습니까? ‘오래 참음(patience)’은 ‘좋지 않은 일 등을 겪다(undergo),’ ‘고통받다(suffer),’ ‘참다, 견디다(bear)’ 등의 뜻인 pati의 라틴어 현재분사형 patiens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가끔 이런 우스개소리를 듣습니다

유다서(5)

1.3.3. 부르심의 셋째 목적은 자유(freedom)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유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그렇습니다. 자유라고 하면 반대의 개념인 종(노예, slavery)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강론을 좀 더 살펴볼까요?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 2:4-5)  도대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반발하는 거짓 형제들은 어떤 논리를 펴고 있습니까? 바로 앞부분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갈 2:1-3)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수단으로써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삶의 방법이라는 외면의 의식적인(ceremonial) 규칙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저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경우에는 할례(circumcision)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죠. 이것에 이의를 다실 분은 없을 겁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또는 일부러 지배당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유다서(4)

1.3.1. 이런 부르심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 그리스도와의 교제(fellowship with Christ)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누군가를 부릅니까? 그리고 어느 경우에 부름을 받습니까? 상대방을 부르고 또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나와 상대방의 교제를 낳습니다. 교제할 때 나는 상대방에게 미쁩니까? 상대방은 나에게 미쁩니까?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일 1:3)  내가 성도를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감(사귐, fellowship)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심심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사귐과 그 사귐의 누림을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은 우리를 부르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불러 사귀고 교제를 나누는 것도 황홀할 터인데, 하물며 상천하지에 유일하신 전능자와 사귀고 그 교제를 누리는 것이 어떠할까 짐작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부르시는 하나님은 분명 미쁘심에(faithful) 틀림없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1.3.2. 부르심의 둘째 목적은 화평(peace)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b)  하나님께서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화평 안에서 살도록(to live in peace) 하기 위함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유다서(3)

1.3. 다음은 NASB에 있는 각주의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서신서에 항상 나타나듯이,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은 구원으로의 일반적인 초대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거부할 수 없고 선택적인 부르심을 일컫는 말입니다. 관련구절을 찾아봅니다. 관련구절에 대한 글은 단순한 저의 생각임을 다시 밝힙니다. 이 글의 초반에 이것저것 쓸 말이 많군요. 참고해야 할 것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롬 1:7)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자들이입니다. 성도(聖徒, saints, holy people)란 누구를 가리키는 걸까요? 라이프성경사전의 도움을 받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속된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일원으로 부름받은 자들을 일컫습니다. 원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켰는데, ‘구분된 자,’ ‘성별된 자,’ ‘거룩한 자’란 뜻의 ‘카도쉬’로 불렸습니다(대하 6:41; 시 16:3).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하기오스’라는 헬라어로 바꾸어 사용했는데, 이것 역시도 ‘거룩하다’는 뜻으로서, 거의 대부분 ‘성도’를 지칭했습니다. 결국 성도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된 모든 거룩한 자들을 말합니다(시 106:16; 벧전 2:5). 이 성도들은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행 9:13; 고전 16:1; 고후 1:1). 이외에도 성도를 가리키는 말로는 믿는 자(행 5: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롬 1:7), 형제(마 23:8),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마 5:45),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롬 9:26), 약속의 자녀(롬 9:8), 빛의 자녀들(눅 16:8), 택하신 족속(벧전 2:9), 택한 그릇(행 9:15), 하나님의 상속자(롬 8:17), 거룩한 백성(사 62:12), 거룩한 제사장(벧전

유다서(2)

1.2. “부르심을 받은 자…”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다른 사람을 부릅니까? 또는 어느 경우에 부름을 받습니까? 부르는 자나 부름을 받는 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길래, 서로 부르고 부름을 받을까요? 먼저 생각나는 것은 뭔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을 때 부르겠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남편에게 평소와는 달리 부르는 경우처럼 말이죠. 뭔가 부탁할 때도 부릅니다. 직접 ‘기사님, 이번 정류소에서 내립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벨을 눌러서 내릴 것을 알리는 것처럼 말이죠. 또는 눈 앞에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릅니다.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 ‘엄마!”하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헤어지자 마자 전화하며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마 그런 연인들은 꿈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웃을 겁니다(그들은 베개 대신 전화기를 베고 잘 겁니다). 어느 경우이든 상대방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도 이름이나 직책을 또박또박 부르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설령 좋지 않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가더라도, 양자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부르고 부름을 받을 겁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상대방을 부르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좋은 관계면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좋지 않은 관계면 뭔가를 따지거나 불평을 토로하기 위해 부를 겁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식당에서조차 일하시는 분들을 ‘이모’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우리 어머니의 자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내가 그 식당에서 나오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식사하는 시간만큼은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모른다 하더라도 ‘이모, 김치 더 주세요.’라고 부릅니다. 내가 상대방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의 관계와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나중에 따질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