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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7)


1.3.5. 부르심의 다섯째는 소망(hope)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엡 4:4) 

연인들이 만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남편에게 겉으로는 합당하게 행하는 것처럼 보여도,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상상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좀 심하게 말해서 간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 화평을 위해, 우리의 자유를 위해 합당하게 행하시며 거룩한 소망을 품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 소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리면, 그것은 불순종의 단계를 넘어서는 영적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 심한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소망 안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딴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 말입니다.


The Lord's Prayer in Greek

Message에서는 이 구절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같은 길에서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도록 모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나 마음으로나 함께 하십시오.” (엡 4:4, Message, 저자 번역) 

그렇군요. 우리는 믿는 이들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같은 방향으로 말입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서로 다른 길을 가거나, 또는 같은 길을 가더라도 방향이 다르면 소망이 아니라 갈등만 일어납니다. 한두 번 경험해 본 것이 아닐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소망을 가지고 부르셨는데, 나는 다른 길로 또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해도, 마음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 하나님, 용서하소서. 하나님과 한 소망 안에서 여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는 모양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1.3.6. 부르심의 여섯째 목적은 거룩(holiness)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4-16) 

다시 연인들을 생각 봅시다. 서로 부르며 서로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우리는, 아니 나는 하나님의 거룩에 맞추려고 합니까? 라이프성경사전에 기록된 거룩에 대해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성경 원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본 의미들은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즉,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레 11:44).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죄악과 구별된 도덕적인 삶(요 17:19)이나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건한 행위를 말합니다(벧전 1:16).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레 19:2; 벧전 1:15-16). 그리고 성전, 성물, 제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등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역시 지극히 거룩합니다.

나는 무지(ignorance) 속에서 살 때의 사욕(evil desires)을 계속 따르고 있습니까? 그런 사욕에서 나를 분리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악한 욕망으로부터 깨끗합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행실에서(in all I do) 거룩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을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거룩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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