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긍휼(자비), 평강(평안), 사랑… 이 낱말들에 있는 공통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또는 주도권(initiative)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주도권 말입니다. 저는 긍휼(자비)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의 내면에는 평강(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고백했듯이,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이웃조차도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제 자신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말은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긍휼을 베풀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마음의 평강과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어보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평안의 관계를 가지려고 애씁니다. 다시 말해서 주도권을 제가 쥐려고 했습니다. 제가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낱말들을 찾아 읽어보니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평안을 나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실 때 나는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고백했듯이 나는 긍휼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속에는 자비심이 없습니다. 평안과 사랑은 두 말할 것도 없지요. 사람이 태어납니다. 갓난 아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그 아기를 키웁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아기는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됩니다. 그는 어릴때 받은 그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저에게는 애초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만약 있다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리석게도 나에게 없는 것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합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애초에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없는 것을 한탄하고, 내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주도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그분의 평안을 나에게 주셔야지 내 속에 평안이 있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분의 자비를 나에게 주셔야지 내 속에서 긍휼의 마음이 싹트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사신 분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글의 맨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은 철저하게 저의 생각일 뿐이니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고, 보내심을 받아 오셨으니까요. 그리스도께서는 기도,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저도 수동적으로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기도를 재발 빨리 읽지 말라고 말입니다. 위의 구절을 일부러 마침표로 나누었습니다. 다시 읽어 봅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 멈추시고… 좀 더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두 번째 문장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살리실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의 가장 수동적인 태도에서 가장 능동적인 면을 봅니다. 나는 어떤가요?
2.8.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편지를 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이지 않지만, 유다는 긍휼(자비)과 평강과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며 격려합니다. ESV(English Standard Version)와 NASB는 ‘배로 곱해지기를(multiplied) 기원’한다고 기록합니다. 고맙게도 저의 주위에는 저를 격려해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항상 빚지고 살아갑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나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 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저와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운 경험이 있습니까?
1절과 2절의 인사말에서 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권을 봅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도권이 보입니다.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찬란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주도권을 갖고 창조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다스리셨고, 지금도 다스리시고, 앞으로도 주도권을 갖고 다스리실 겁니다. 문제는 그 주도권에 반항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주도권을 인정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저자인 유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인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처하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노예라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방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최소한 짧은 순간이나마 유다의 겸손을 생각합니다. 유다의 겸손을 짧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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