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다서(18)


2.7. 긍휼(자비), 평강(평안), 사랑… 이 낱말들에 있는 공통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또는 주도권(initiative)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주도권 말입니다. 저는 긍휼(자비)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의 내면에는 평강(평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고백했듯이,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이웃조차도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제 자신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말은 있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긍휼을 베풀고 자비의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마음의 평강과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어보려고 애씁니다. 하나님과 평안의 관계를 가지려고 애씁니다. 다시 말해서 주도권을 제가 쥐려고 했습니다. 제가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낱말들을 찾아 읽어보니 그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조금은 알듯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평안을 나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실 때 나는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고백했듯이 나는 긍휼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속에는 자비심이 없습니다. 평안과 사랑은 두 말할 것도 없지요. 사람이 태어납니다. 갓난 아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이 그 아기를 키웁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그 아기는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됩니다. 그는 어릴때 받은 그 사랑을 나누어 줍니다. 저에게는 애초에 사랑이 없었습니다. 만약 있다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리석게도 나에게 없는 것을 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실패합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애초에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도 없는 것을 한탄하고, 내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주도권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께서 그분의 평안을 나에게 주셔야지 내 속에 평안이 있든지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분께서 그분의 자비를 나에게 주셔야지 내 속에서 긍휼의 마음이 싹트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사신 분 같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글의 맨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은 철저하게 저의 생각일 뿐이니까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부터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고, 보내심을 받아 오셨으니까요. 그리스도께서는 기도, 특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저도 수동적으로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이 기도를 재발 빨리 읽지 말라고 말입니다. 위의 구절을 일부러 마침표로 나누었습니다. 다시 읽어 봅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 멈추시고… 좀 더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두 번째 문장을 읽으십시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살리실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셨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도의 가장 수동적인 태도에서 가장 능동적인 면을 봅니다. 나는 어떤가요?

2.8.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편지를 받는 이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이지 않지만, 유다는 긍휼(자비)과 평강과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며 격려합니다. ESV(English Standard Version)와 NASB는 ‘배로 곱해지기를(multiplied) 기원’한다고 기록합니다. 고맙게도 저의 주위에는 저를 격려해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항상 빚지고 살아갑니다. 그분들이야말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입니다. 나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 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저와는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첫단추부터 잘못 끼운 경험이 있습니까?

1절과 2절의 인사말에서 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권을 봅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더 나아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도권이 보입니다.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찬란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창조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주도권을 갖고 창조하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다스리셨고, 지금도 다스리시고, 앞으로도 주도권을 갖고 다스리실 겁니다. 문제는 그 주도권에 반항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주도권을 인정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저자인 유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인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처하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노예라고 자신을 낮추는 모습에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방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최소한 짧은 순간이나마 유다의 겸손을 생각합니다. 유다의 겸손을 짧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다서(101)

18.3.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도 모욕과 희롱은 계속됩니다. Crucifixion, from the Buhl Altarpiece, a particularly large Gothic oil on panel painting from the 1490s.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35-44)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홍포를 입힙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가시관을 씌웁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갈대를 쥐게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조롱의 인사를 합니다. 모든 왕의 왕에게 그 왕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뇌이며(마 27:42-43) 희롱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대놓고 조롱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선심쓰는 척하며 이웃에게 조롱의 옷과 가시관과 갈대을 주지는 않습니까? 더 교묘한 방법으로 조롱의 인사, 글자그대로 가시가 돋힌 인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웃이 평소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고통을 같이 느끼지는 못할 망정, 어설픈 나의 잣대로 조롱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웃의 서러움을 공...

유다서(100)

18.2. 이 마지막 때에 경건하지 않은 욕망을 따르며 조롱하는 자들(mockers[KJV, NASB], scoffers[NIV, ESV])이 있을 것입니다. ‘조롱(嘲弄)하다’는 ‘비웃거나 깔보면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은 ‘기롱(譏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롱하다’는 ‘실없는 말로 놀리다’라는 뜻입니다. 조롱을 성경에서 검색해 보니 많은 구절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옮깁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잠 30:17) 상상하시겠습니까? 저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비웃고 깔보면서 놀리면, 아버지를 실업는 말로 놀리면, 그렇게 조롱하는 자식의 눈이 까마귀에게 쪼인답니다. 독수리가 와서 그 시체의 살점을 새끼에게 먹이로 준답니다. 거의 공포영화 수준입니다.  ,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잠 17:5)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 14:31)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데, 비웃음까지 당합니다. 버스비가 없어서 부르튼 발을 끌며 걸어가는데, 깔보는 시선까지 느껴집니다. 자식을 학원에 보낼 돈이 없어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놀림을 받습니다.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Édouard Manet, Jesus Mocked by the Soldiers, c. 1865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

유다서(106)

19.2. … 육에 속한 자며 ... 조금 전의 갈라디아서 목록(갈 5:19-21)에 있는 것처럼 거짓 선생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시기와 분열을 일으키는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입니다. 단순한 본능(mere natural instincts)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약 3:14-16) 육에 속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쓰디쓴 시기심(독한 시기, bitter envy)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야망(다툼, selfish ambition)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설령 이런 것들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할텐데, 이들은 그런 마음을 자랑합니다. 이들은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합니다. 진리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거짓 지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위의 것이며, 영적이지 않으며(정욕의 것, unspiritual), 귀신의 것입니다. 이런 시기와 야망이 있는 곳에는 무질서(혼란, disorder)와 모든 악한 일(every vile practice)이 있을 뿐입니다. 하늘의 것은 진리이며, 땅의 것은 거짓입니다. 위에서도 인용했지만, 야고보 사도의 다음 구절을 다시 적어 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사도는 아래의 것과 위의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분명히 나누고 있습니다. 성결(pure), 화평(peaceable), 관용(gentle), 양순(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