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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5)


1.3.3. 부르심의 셋째 목적은 자유(freedom)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갈 5:1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유에 대해 강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 5:1) 

그렇습니다. 자유라고 하면 반대의 개념인 종(노예, slavery)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강론을 좀 더 살펴볼까요?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갈 2:4-5) 

도대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반발하는 거짓 형제들은 어떤 논리를 펴고 있습니까? 바로 앞부분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갈 2:1-3)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수단으로써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삶의 방법이라는 외면의 의식적인(ceremonial) 규칙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저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경우에는 할례(circumcision)라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죠. 이것에 이의를 다실 분은 없을 겁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또는 일부러 지배당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율법이라는 가르침에 의해 지배당합니다. 물론 율법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완전한 존재로,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되기 위한 일종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의 수준은 너무나 높아서 어떤 인간도 그 율법을 성취할 수 없음을 아실 겁니다. 자연히 죄책감이 들고 하나님을 멀리 할 수 밖에 없겠지요. 몸부림치면 칠수록,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높은 벽에 부딪쳐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봅시다. 어차피 인간은 어떤 존재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배받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구원을 주시고,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기는 것이 당연히 낫지 않겠어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라고 부르십니다. 그 자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라는 표현이 많은 모양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행동하십시오.” 한번 생각해 볼만한 말입니다. 역시 연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핏 보면 자유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종노릇 하려고 합니다. 사랑의 노예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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