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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2)


1.2. “부르심을 받은 자…” 

여러분은 어느 경우에 다른 사람을 부릅니까? 또는 어느 경우에 부름을 받습니까? 부르는 자나 부름을 받는 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길래, 서로 부르고 부름을 받을까요? 먼저 생각나는 것은 뭔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을 때 부르겠지요.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남편에게 평소와는 달리 부르는 경우처럼 말이죠. 뭔가 부탁할 때도 부릅니다. 직접 ‘기사님, 이번 정류소에서 내립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벨을 눌러서 내릴 것을 알리는 것처럼 말이죠. 또는 눈 앞에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릅니다. 마치 아이가 잠에서 깨어 ‘엄마!”하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헤어지자 마자 전화하며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마 그런 연인들은 꿈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부르며 웃을 겁니다(그들은 베개 대신 전화기를 베고 잘 겁니다).

어느 경우이든 상대방을 부른다는 것은, 그것도 이름이나 직책을 또박또박 부르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은 부르는 자와 부름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설령 좋지 않은 내용의 이야기가 오가더라도, 양자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부르고 부름을 받을 겁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상대방을 부르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좋은 관계면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겁니다. 좋지 않은 관계면 뭔가를 따지거나 불평을 토로하기 위해 부를 겁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식당에서조차 일하시는 분들을 ‘이모’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우리 어머니의 자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내가 그 식당에서 나오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식사하는 시간만큼은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모른다 하더라도 ‘이모, 김치 더 주세요.’라고 부릅니다.

내가 상대방을 부른다는 것은 그와의 관계와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나중에 따질 문제이고, 그와 나와의 관계가 가장 먼저입니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부를 일이 없겠지요. 관계가 없는데 왜 부르겠습니까? 설령 그와 나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통해 부르고 부름을 받을 겁니다. “아, 이 일에는 아무개가 적격이야. 그 사람 알아? 몰라? 그럼 내가 그에게 부탁하지. 내게 맡겨.”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것만큼 쓸쓸한 것이 있을까요? 오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씁쓸한 농담이 있습니다. 그나마 갈 곳이 있으니 반은 다행입니다. 그러나 오라고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으면 너무나 비참합니다. 지금은 그런 경우가 많이 사라졌습니다만, 예전에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다가 저녁이 되면 하나둘씩 집으로 갑니다. “아무개야, 빨리 와서 저녁 먹어.”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를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쭈뼛쭈뼛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며 울먹거리는 그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갑자기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친구야, 우리 집에 가서 밥먹자.”라고 불러주면, 그 아이의 마음이 어떨까요?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요? 누군가를 부르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름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이 글이 성경에 관한 글이니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글은 철저하게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보통 ‘하나님께서 나를 불렀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 그 목소리를 들으신 분도 있을 겁니다. 어떤 비전이나 환상 또는 꿈을 통해 부르셨다고 확신하는 분도 있습니다. 직접 듣지 않더라도 우회적으로 부르시는 것을 느끼고 반응하는 분도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성경을 읽다가 부르심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어느 경우이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by Eugène Delacroix.

부르심에 관한 수많은 성경구절이 있습니다만, 이 구절이 제일 먼저 떠오르길래 적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가는 강아지를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지나가는 강아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부르셨다고 기록된 구절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창 1:26). 하나님께서는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summoned you by name). summon의 기본적인 뜻은 ‘소환하다’입니다. 불러들인다는 뜻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왜 야곱(Jacob)을 부르실까요? 여호와께서 왜 이스라엘(Israel)을 소환하실까요? 주님께서 왜 나를 불러들이실까요?

여러분은 상대방을 왜 부릅니까? 그리고 상대방은 여러분을 왜 부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관계 때문일 겁니다. 좋은 관계라면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만약 나쁜 관계라면 관계의 회복을 위해 부를 겁니다. 나의 뇌리 속에서 상대방을 뽑아낼 수 없기 때문일 겁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독한 마음을 품고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는 한, 상대방은 나의 뇌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고, 나도 상대방의 뇌리 속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할진대, 하나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목이 쉬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를 소환하십니다. 우리를 불러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만큼이나 우리도 하나님을 부릅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릅니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100으로 할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부를까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하시기 위해 100만큼의 노력과 정성으로 애타게 부르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부를까요? 교회에 좀 다닌다고, 입술에 “주여, 주여!”를 그냥 달고 있지는 않는지요? 기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할 말만 일방적으로 하지는 않는지요?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나와 관계를 다시 맺자고 하시는데, 나는 그 부르심에 얼마나 반응을 보일까요? 반응한다고 하더라도 그 반응 속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요? ‘당신은 말하시오. 나는 듣지 않겠나이다.’ 이런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나의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금방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마치 결재 받으러 사장실에 들어가 싸인만 받고 금방 뛰쳐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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