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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8)


1.3.7. 부르심의 일곱째 목적은 복(blessing)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3:8-9) 

An elderly Isaac blessing Jacob, oil on canvas by Govert Flinck, 1638

이 구절을 찬찬히 읽어보니, 나를 위해 복을 빌라는 말씀이 아니군요. 모두 사이 좋게 조화를 이루어(마음을 같이 하여, harmonious) 같은 마음을 가지고(동정하며, sympathetic) 복을 빌라고 합니다. 영 안에서(in spirit)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brotherly), 친절한 마음으로(kindhearted),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humble) 복을 빌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복을 빌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복은 “남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speak well of),” 즉 “칭송하는 것(eulogize)”입니다. 칭송(eulogy)이라는 낱말은 ‘좋은’ 또는 ‘진실’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eu와 ‘말’이라는 뜻의 logia가 합쳐진 낱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장례식에서 ‘고인에 대한 추도 연설’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사도 베드로는 형제들에게 좋은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복을 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비방하는 사람에게 주는 복은 그를 구원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그의 구원과 영적인 성장을 위해 기도하며, 그의 행복(well-being)을 바라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나의 복을 위해 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좋은 말 해주는 것이 복이라는 말이지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1.3.8. 그리고 NASB에 의하면 부르심의 여덟째 목적은 영원한 영광(eternal glory)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벧전 5:10) 

사도 베드로의 이 구절은 부르심에 대한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을 모든 은혜를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아둔한 나는 그 영원한 영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영광을, 그것도 영원한 영광을 어찌 알겠습니까?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으면 그 영광을 알것도 같습니다만,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예배와 집회 등으로 은혜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고 살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은혜를 저버리고 고난을 당합니다. 상천하지에 홀로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고통과 번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잊을 때를 대비해서 베드로전서 5장 10절의 하반절 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친히(Himself) 나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친히 나를 회복시키십니다. 친히 나를 굳건하게 만드십니다. 친히 나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친히 나를 변함없게 만드십니다. 비록 나는 그 영원한 영광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영광을 위해 나를 부르십니다. 당연히 그 부르심에 대답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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