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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15)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 2)

2.1. “긍휼과 평강”은 유대인들의 흔한 인사였다고 합니다. 이것에 “사랑”이 첨가되었습니다. 참고로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긍휼이라는 낱말 대신 ‘자비’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그건 그렇고, 신약성경의 이곳에서만 이 3가지 특징들이 함께 나타난다고 합니다. 율법과 행위가 있는 곳에는 실패와 죽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은혜(grace)가 있는 곳에는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풍성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4)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 5: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롬 5:5)

2.2. 라이프성경사전에 나오는 긍휼(矜恤, mercy)을 볼까요? 다정히 사랑하며 측은히 여김(시 25:6), 불쌍히 여겨 동정함(pity), 상대방에 대한 불붙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고 은혜를 베푸는 것(눅 1:54)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하밈’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형이 동생에게 가지는 애틋한 정을 의미합니다(시 103:13; 사 13:18). 따라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세 역시 부모형제 사이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심정으로 행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chesed)’입니다. 이 말은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역시 ‘긍휼’로 번역되는데, 특히 호세아 선지자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파기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그 언약을 지키시며 택한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입니다.

이 긍휼하신 성품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 사건입니다(엡 2:4; 딛 3:5-6). 그러기에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약속받는 이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결과입니다(롬 9:23; 벧전 2:10).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마 18:33; 골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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